[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배우, 안무가, 연출가, 무술감독, 아티스트 김정열을 한 가지 직함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1986년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한 이후 40년 가까이 무대와 공연 현장을 지켜왔다. 배우로 출발해 MBC 무용단에서 춤을 익혔으며, 이후 안무와 무술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뮤지컬 《블루사이공》,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투란도트》, 《백야》, 《꿈》, 《드라큘라》 등의 안무에 참여했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와 《아이언 마스크》, 《메피스토》, 《여명의 눈동자》 등에서도 작품의 움직임을 설계했다. 현대극장, 에이컴, 서울예술단, 한전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등 다양한 무대에서 배우와 안무 그리고 무술감독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나 여러 작품과 이력을 거쳐온 그에게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묻자, 그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
"제 정체성을 찾는 일은 아직도 숙제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직업적 명칭을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길거리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해서 배우, 연출, 안무가, 무술감독이라는 여러 역할을 경험했지만, 그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자신만의 방향을 여전히 찾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김정열에게 예술은 이미 정해진 답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연히 시작한 연극, 부족함에서 비롯된 공부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공연계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이 마음을 움직였고, ‘저 일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로를 찾았다. 포스터를 붙이고 티켓을 팔며 무대 주변의 일을 익혔다. 1987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앙상블로 무대에 오른 뒤에는 노래와 춤, 연기가 결합된 뮤지컬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무대에 설수록 자신의 부족함도 분명하게 보였다. 춤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춤을 배웠고, 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을 때는 무술을 익혔다. 또한 MBC 무용단에서 활동하며 춤을 공부했고, 한때는 하루 여덟 시간씩 저녁부터 새벽까지 4년 가까이 무술을 수련했다.
“그걸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좋아했고, 더 알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구체적인 목적을 정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쌓은 시간은 훗날 그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반복해서 익히며 동작의 원리를 이해한 경험은 안무와 무술 감독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정열에게 공부는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부족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태도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배우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확인한다. 그가 여러 분야를 넘나들 수 있었던 힘도 새로운 영역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배우의 한계를 넘어 안무의 가능성을 탐구하다
배우 김정열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은 《여명의 눈동자》였다. 그는 이 작품에 배우이자 무술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안무까지 맡게 되었다. 한 작품 안에서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배우를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어요. 그때 깨달았죠. 모든 것을 다 하려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그는 그때 자신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배우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작품 속 움직임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옮긴 것이다. 이는 배우를 포기한 선택이라기보다,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 결정이었다. 이후 그는 《셜록 홈즈》 시리즈와 《아이언 마스크》, 《명랑가족》, 《나혼자만 레벨업》 등 여러 작품에서 안무와 무술 감독으로 참여하며 장면의 움직임과 인물의 신체 표현을 설계해왔다. 서울예술단, 경기도립, 고려극장 등과 협업하며 작품의 성격과 무대 규모에 맞는 움직임을 창조해왔다. 그에게 안무는 단순히 춤 동작을 구성하는 일이 아니다.
“안무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를 몸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찾는 것입니다.”
배우의 몸에서 인물의 움직임을 발견하다
작품을 맡으면 그는 먼저 시대와 배경을 살핀다. 이야기가 어떤 시대에 놓여 있는지,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리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깊이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인물의 심리와 배우의 신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움직임을 구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동작을 배우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는다.
“제 몸짓을 주는 게 아니라, 그 배우가 할 수 있는 몸짓을 찾으려고 해요.”
같은 장면이라도 배우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체 조건과 움직임의 습관이 다르고,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김정열은 안무가의 몸을 배우에게 복제하게 하기보다, 배우 자신의 몸에서 인물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돕는다. 그에게 몸은 단순히 기술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다. 인물의 감정과 삶을 드러내는 언어다. 한 걸음의 속도, 시선의 방향, 손끝의 긴장, 몸을 돌리는 각도에도 인물의 성격과 상황이 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무술 역시 마찬가지다. 장면의 강도와 화려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세심하게 살핀다. 싸움과 충돌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드러내는 장면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몸을 공부하다, 사람을 공부하게 되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관심은 움직임의 기술에서 사람 자체로 옮겨갔다. 젊은 시절에는 선택받기 위해 몸을 만들고 노래와 연기를 익혔다. 그러나 스태프로서 작품 전체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 그리고 각자의 삶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찾아내며,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사람이 하는 작업이니까요."
몸을 이해하려는 공부는 곧 인간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 셈이다.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이 살아온 시대와 환경을 알아야 한다. 배우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특성과 감각을 존중해야 한다. 작품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의 공부가 최근 인문학과 철학으로까지 확장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몸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일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는 지금도 무술을 배우고 있다. 최근에는 작품 속 탱고 장면을 만들면서 탱고를 제대로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에 직접 탱고 공부를 시작했다.
“저는 천재가 아니니까 계속 봐야 합니다. 현대무용도 보고, 발레도 보고, 재즈도 보고, 아이돌 춤도 봅니다. 아는 만큼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가 말하는 공부는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관찰하고, 더 깊이 이해하며, 배우와 인물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한 공부다. 김정열은 모르는 것을 인정할 때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믿는다.
“완성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김정열은 완성이 도달해야 할 최종 지점이 아니라고 말한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이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완성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안무도 그렇고, 무술도 그렇고, 지금 하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에게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족함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이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품으며 다시 배우는 힘이다. 김정열은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작업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지, 배우와 동료들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다음 작업에서 무엇을 더 시도할 수 있는지를 되돌아본다. 작품은 끝나지만 배움은 계속된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공연계를 바라며
그의 시선은 자신의 작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뮤지컬 현장을 지켜본 그는 나이가 들수록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배우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특정 스타를 중심으로 시장이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앙상블과 조연으로 무대를 지켜온 배우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연을 사랑하고 현장을 지켜온 사람들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자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뮤지컬을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바라는 공연계의 변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환경,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현장이다.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의 삶이 일회성 출연이나 흥행 여부에 좌우되지 않고, 각자가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는 김정열 자신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화려한 성공보다 꾸준히 현장에 남아 배우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한 사람이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결국 공연예술의 깊이와 지속성을 만든다고 믿는다.

처음 마음을 지키는 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한동안 말을 고르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제가 제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조언을 하겠어요.”
그러면서도 한 가지는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 왜 이 일을 하고 싶었는지 그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마음을 지키는 힘이 결국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아닐까요.”
그에게 예술이란 결국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일이다. 현장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역할과 작업 방식이 달라지더라도 출발점에 있었던 진심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 활동한다는 것은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는 일이다. 김정열은 배우에서 안무가로, 안무가에서 무술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지만, 그 밑바탕에는 ‘좋아서 시작했고, 더 알고 싶어서 계속한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짧고 분명하게 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 그리고 부딪혀 봐.”
그 말은 김정열이 걸어온 40년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연극에 부딪혔고, 춤과 무술에도 도전했다. 배우로서 활동하다 안무를 시작했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는 아직 자신을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을 찾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족하기에 배우고, 모르기에 질문하며, 자신의 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더 나은 사람과 더 나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김정열은 지금도 몸을 통해 사람을 배우고, 사람을 통해 예술을 다시 익힌다. 완성은 없다. 다만 떠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을 뿐이다. 그는 내일도 다시 배우러 갈 것이다.
/수원=박상욱 기자(sangwook@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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