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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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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타 트레킹, 차우키 산자락을 걷다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1>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⑯ 편에서 이어집니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스노 계곡을 따라 주타로

카즈베기에 아침이 온다. 룸스호텔 뒤편 쿠로 산 너머로 하늘이 밝아온다. 빛을 등진 쿠로 산은 검다. 밤새 어둠에 잠겨 있던 카즈베크 산이 산정부터 붉게 물들고, 만년설이 드러난다. 오늘은 카즈베기 남동쪽의 차우키(Chaukhi) 산군 아래 차우키 호수에 간다. 차우키는 여러 암봉으로 이루어졌는데 최고봉은 아사티아니(Asatiani,3,842m) 봉이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룸스호텔에서 바라본 카즈베크 산의 아침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오전 9시, 호텔을 나선다. 조지아 군사도로를 남쪽으로 달리다 으로 접어든다. 차는 굽이진 산길을 따라 스노(Sno) 계곡 깊숙이 들어간다. 포장도로가 끝나자 길은 거칠어지고, 앞차가 일으킨 흙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주타(Juta) 마을을 2km 앞둔 지점에 사륜구동 차를 세우고 이 길에 익숙한 현지 차량으로 갈아탄다. 산허리를 따라 난 길은 좁고 한쪽은 계곡 낭떠러지다. 호텔을 나선 지 한 시간 만에 해발 2,000m가 훌쩍 넘는 산골 마을 주타에 닿는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주타마을로 가는 길에 만난 동행. [사진=박성기 작가]

마을에 들어서자, 집과 집 사이, 지붕 너머, 골목이 끝나는 곳에 차우키 산이 서 있다.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산이 먼저 와 있다. 차우키 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은 마을을 가로질러 내달린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주타마을에 들어서다. [사진=박성기 작가]

오전 10시, 배낭끈을 조여 매고 길에 오른다. 마을 끝 전봇대에 붙은 작은 표지판에 'Fifth Season 1000m'라고 적혀 있다. 피프스 시즌 산장까지 1km. 마을에서 시작되는 초반 길은 돌이 드러난 거친 오르막이다. 오래된 목조주택이 비탈에 기대듯 서 있고, 그 사이로 좁은 산길이 위를 향한다. 오를수록 주타의 지붕은 아래로 내려앉고, 뒤를 돌아보면 스노 계곡을 따라 코카서스의 산줄기가 여러 겹으로 포개진다. 마을은 작아지는데 산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커진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주타마을을 출발한다. 오르막의 시작. [사진=박성기 작가]

걸을수록 커지는 산

오르막 옆으로 연분홍 꽃송이들이 긴 줄기 끝에서 흔들리고, 그 사이사이 노란 꽃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급한 오르막이 잦아들면 넓은 풀밭이 펼쳐지고 제타(Zeta) 캠프를 지난다. 조금 더 올라 언덕을 넘어서니 피프스 시즌(Fifth Season) 산장이 보이고, 그 뒤로 차우키 산군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Fifth Season 산장과 뒤로 보이는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너른 초원엔 보랏빛 꽃은 초록 풀밭에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듯 선명하다. 어떤 꽃은 부드러운 초원에서 피고, 어떤 꽃은 흙 한 줌 없어 보이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렸다. 회색 바위에는 주황빛과 흰빛 지의류가 얼룩처럼 번져 있다. 차우키 호수를 보러 왔는데 자꾸 작은 꽃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고개를 들면 육중한 산이고 고개를 숙이면 여린 꽃들의 세상이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꽃과 산. [사진=박성기 작가]

산장 앞 이정표는 차우키 호수와 차우키 패스, 아부델라우리 호수 등 여러 갈래 길을 가리키지만, 시선은 자꾸 그 뒤의 산으로 향한다. 초원 끝에서 눈 덮인 차우키 산이 하늘을 막고, 깊게 팬 골짜기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흰 줄을 긋고 있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차우키 호수 가는 길. [사진=박성기 작가]

산장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산장 밖 나무 의자에 앉았다. 산 풍경에 잠시 동안 흠뻑 빠진 모양이다. 커피가 다 식었다. 여기서부터는 산을 바라보는 길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멀리서 말 탄 사람들이 한 줄로 산을 향해 간다. 말들이 한 줄로 앞말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구름은 산봉우리에 걸리고 말들은 초원을 지난다. 서두르지 않아도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다.

급류를 건너 호수로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급류를 만나다. [사진=박성기 작가]

처음 앞을 가로막는 계곡이다. 급류는 바위에 부딪치며 거친 포말을 일으킨다. 계곡 위 철다리가 크게 뒤틀려 물속으로 내려앉아 있다. 난간도 휘고 철골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리라기보다 물살을 견디는 뼈대만 남은 다리다.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거나 신발을 벗고 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다리를 택한다. 휘어진 철판 위로 한 발씩 옮기는데 발 아래로 차가운 계곡물이 세차게 지나간다.

몇몇 사람은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일행 한 사람이 신발을 젖지 않게 하려고 건너편으로 던졌는데, 한 짝이 그만 계곡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어어!" 모두가 소리를 지른다. 신발은 잠시 물 위에 떠오른다. 바위 사이를 몇 번 휘돌더니 순식간에 아래로 떠내려간다.

신발을 잃은 여행객은 어쩔 수 없이 등산 양말을 여러 겹 겹쳐 신는다. 다행히 이후로는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호수에 내려앉은 차우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차우키 호수. [사진=박성기 작가]

정오 무렵 마침내 차우키 산군 아래 작은 호수에 닿는다.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 작은 물이 주변의 산과 하늘을 통째로 담고 있다. 호숫가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는 사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말없이 산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나도 호숫가에 자리를 잡는다. 물 위에 사람들이 비친다.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면 물속의 사람도 손을 흔들고, 바람이 지나가면 사람과 산이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잠잠해지면 다시 제 모습을 찾는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차우키 호수. [사진=박성기 작가]

고개를 들면 높은 산등성이에 아직 눈이 남아 있고 구름이 능선을 덮었다가 벗겨낸다. 시선을 낮추면 그 산과 구름이 다시 물속에 들어와 있다. 산이 둘이다. 하나는 하늘 아래 서 있고, 하나는 물속에 누워 있다. 주타 마을에서는 하나의 산으로 보였던 차우키가 걸어오는 동안 초원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산자락 한가운데에 들어와 앉아 있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물속의 외국인들. [사진=박성기 작가]

호숫가 한쪽에서 외국 젊은이 둘이 머뭇거리다 겉옷을 벗고 팬티차림으로 바로 다이빙하듯이 입수한다. 곧 허겁지겁 달리다시피 호수 밖으로 튀어 나왔다. 차가운 호수 물속에서 혼비백산한 모양이다. 호수에 손을 담근다. 만년설이 녹은 물이라 손끝이 얼얼할 만큼 차다. 멀리 두 사람에게 엄지척을 한다.

싸온 음식을 먹고 호수 옆 나무 데크 쉼터에 올라 나무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댄다. 따뜻한 햇볕이 얼굴 위로 내려온다. 눈앞에는 산이 있고 발아래에는 호수가 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산은 호수에 비치고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있다.

물길 따라 다시 주타로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하산길, 멀리 산장이 보인다. [사진=박성기 작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등 뒤로 차우키 산군을 두고 걸어온 쪽을 바라본다. 올라올 때는 온통 산만 보였는데 이제 앞이 트인다. 초원이 길게 아래로 흘러내리고 그 너머로 주타 방향의 산줄기가 겹겹이 이어진다. 같은 길인데 풍경은 다르다. 양말 여러 겹으로 버티던 사람도 결국 도중에 말을 얻어 탄다. 조금 전까지 난감해하던 사람이 말 등에 올라 초원을 내려가니 모두 웃는다. 우리는 그 뒤를 걸어서 따른다.

오후 3시 무렵 주타 마을로 돌아온다. 아침에 타고 온 차량은 마을 아래 2km쯤 떨어진 곳에 세워두었다. 올라올 때 현지 차량으로 지나온 그 길을 이번에는 걸어서 내려간다. 그제야 아침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만난다. 길 왼쪽이 협곡으로 급격한 낭떠러지고, 골짜기 바닥에서는 계곡물이 거칠게 밑으로 내달린다. 몇 걸음 벼랑 쪽으로 다가서기만 해도 다리가 서늘해질 만큼 깊다.

시선을 가까이 돌린다. 길섶에는 들꽃이 만발해 있다. 높은 산에서는 꽃도 산을 닮는 것일까. 한쪽에는 아찔한 협곡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꽃밭이 이어진다. 차를 타고 올라갈 때는 그저 지나쳤던 길이다. 걸어서 내려오니 비로소 보인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주타마을에서 차가 있는 곳으로. [사진=박성기 작가]

차량을 세워둔 곳이 가까워질 즈음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다. 차우키 산은 다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오늘 산은 정상 대신 긴 자락을 내어주었다. 그 자락에는 꽃이 있고 차가운 계곡물에 떠내려간 신발 한 짝도 있다. 문득 얼굴에 미소를 띤다. 어쩌면 그 신발은 지금도 어느 물길을 따라 우리보다 먼저 주타를 빠져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차우키 산군.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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