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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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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무크라니, 와인의 시간을 만나다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④ 편에서 이어집니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라벤더 너머, 왕가의 저택

조지아 중부 카르틀리(Kartli) 지방의 무크라니에 들어선다. 트빌리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은 오래전부터 포도를 재배해온 지역이다. 그 한가운데 조지아 왕가의 역사와 와인의 시간을 함께 품고 있는 대저택 샤토 무크라니(Chateau Mukhrani)가 자리하고 있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 [사진=박성기작가]

샤토 무크라니 와이너리 정문 앞이다. 문 너머 저 멀리 저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넓은 잔디와 오래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촛불처럼 곧게 솟은 사이프러스가 줄지어 서 있고, 커다란 시더(삼나무 종류)는 가지 위로 아직 푸른 솔방울을 매달고 있다. 낮게 다듬은 회양목 사이로 장미와 작은 꽃들이 피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정원을 보랏빛으로 물들인 라벤더다. 무리지어 핀 라벤더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보랏빛 물결이 일고 은은한 향이 퍼진다. 연초록 잔디와 짙은 초록 사이프러스 사이에서 그 빛깔은 더욱 선명하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라벤더향이 기분좋게 한다. [사진=박성기작가]

정원 한쪽에서는 정원사들이 화단을 다듬고 나뭇가지를 손질한다. 오래된 무크라니 저택과 아름다운 정원은 세월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손길 속에서 완성되는 모양이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무크라니 저택과 줄지어선 사이프러스(Italian Cypress). [사진=박성기작가]

정원을 지나 대저택 앞에 닿는다. 오래된 소설 속 한 장면에 들어선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땅 아래에서 익어가는 와인의 시간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지하 와인 저장고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한 걸음씩 내려서자 바깥의 눈부신 햇살과 한낮의 열기는 금세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흙과 나무, 오래 숙성된 포도주가 뒤섞인 듯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긴다.

저장고에는 와인을 담은 오크통과 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발효와 숙성 과정을 살펴본다. 포도의 품종과 재배지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발효하고, 무엇에 담아 얼마나 기다리느냐에 따라 한 병의 와인은 전혀 다른 향과 맛을 갖는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와인저장고. [사진=박성기작가]

조지아의 전통적인 양조법에는 크베브리(Qvevri)가 있다. 커다란 토기 항아리를 땅속에 묻고 포도즙과 껍질, 씨, 때로는 줄기까지 넣어 발효하고 숙성한다. 땅속의 비교적 일정한 온도 속에서 시간을 보낸 와인은 빛깔과 향이 깊어진다.

오크통의 시간은 또 다르다. 와인이 나무통 안에서 미세하게 공기와 접촉하고 오크의 향을 받아들이면서 맛이 한층 부드럽고 복합적으로 변한다. 새 오크통인지 오래 사용한 통인지, 얼마나 오래 숙성했는지에 따라서도 맛은 달라진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오크통에서 숙성중인 와인. [사진=박성기작가]

크베브리가 조지아의 오래된 시간을 품는 항아리라면, 오크통은 그 시간 위에 또 다른 향을 더하는 셈이다.

왕가의 흥망도 와인처럼 숙성되고

샤토 무크라니의 와인에는 한 가문의 역사도 스며 있다. 무크라니 가문은 조지아 왕실인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한 갈래다. 19세기 이바네 무크란바토니 공은 프랑스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법, '샤토'의 개념을 접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유럽식 양조 기술을 도입했다. 조지아의 오래된 와인 전통에 유럽의 기술이 더해지면서 무크라니 와인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조지아에서 전통적으로 와인을 마시던 옛그릇 [사진=박성기작가]

그러나 가문의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대의 격변과 소비에트 시기를 거치며 저택은 주인을 잃었고 포도밭과 저장고도 쇠락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샤토는 2000년대 들어 복원되기 시작했고, 포도밭도 다시 살아났다.

지금의 샤토 무크라니는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다. 왕가의 번영과 몰락, 오랜 침묵과 다시 살아난 시간이 저택과 포도밭, 지하 저장고에 겹겹이 쌓여 있다. 오래된 오크통 사이를 걷고 있자니 한 병의 와인 속에는 포도의 향뿐 아니라 이 땅이 지나온 시간까지 숙성되어 있는 듯하다.

저장고에서 시작된 작은 잔치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성기작가]

저장고를 둘러본 뒤 기다리던 시음이 시작된다. 오래된 벽돌 아치 아래 놓인 긴 테이블에는 사람 수만큼 와인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어둑한 저장고에서 잔마다 붉은빛과 황금빛이 차오르자 분위기도 슬며시 달아오른다.

시음에는 조지아 토착 품종으로 만든 타브크베리(Tavkveri) 레드와인을 비롯해 샤토 무크라니의 상급 라인인 컬렉션 세크레트(Collection Secrete) 화이트 2022와 컬렉션 세크레트 레드 2020이 차례로 나온다. 화이트는 르카치텔리와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을 블렌딩한 와인이고, 레드는 사페라비를 중심으로 여러 적포도 품종을 섞어 만든 와인이다. 와인이 바뀔 때마다 포도의 품종과 양조 방식, 숙성에 따른 향과 맛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시음장에 나온 샤토 무크라니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잔을 가볍게 돌려 향을 맡고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타브크베리에서는 잘 익은 붉은 과일의 향과 부드러운 맛이 느껴지고, 컬렉션 세크레트 레드는 한층 짙고 묵직하다. 황금빛을 띠는 화이트에서는 산뜻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여운이 올라온다. 조금 전까지 저장고에서 들었던 발효와 숙성에 관한 이야기가 비로소 혀끝의 맛으로 이해된다.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라도 품종이 다르고, 어떻게 빚고 얼마나 기다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향과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기하다. 와인은 결국 시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술인지도 모른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와인 시음하는 사람들. [사진=박성기작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잔에 투명한 술이 따른다. 차차(Chacha)다. 포도를 압착하고 남은 껍질과 씨 등을 발효해 증류한 조지아의 전통주다. 맑은 빛깔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넘기자 와인과는 전혀 다른 강렬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까지 뜨겁게 번진다. 잔을 내려놓고 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드럽게 향을 음미하던 와인의 시간은 온데간데없고, 차차는 자신의 존재를 단번에 알려준다.

한 잔에 담긴 조지아의 시간

조지아는 세계 18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생산량의 절반을 수출하지만, 수출 지역이 러시아에 편중되어 있어 외국인들에게 조지아 와인은 낯설다. 그러나, 조지아 국민들에게 와인은 오랫동안 자부심의 산물이었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고대 전통과 유럽의 우아함이 만나는 조지아 와인의 역사 [사진=박성기작가]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술에 머물지 않는다. 땅과 세월을 기억하고, 사람들과 한 잔을 나누며 기쁨을 이어가는 조지아의 오래된 문화였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샤토 무크라니를 돌아보며 한 잔의 와인 속에 포도가 자란 땅과 오랜 시간,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함께 담겨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원을 물들이던 라벤더 향과 서늘한 저장고의 공기, 크베브리와 오크통, 잔 속에서 빛나던 붉은 황금빛 와인까지 조지아의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샤토 무크라니 대저택과 시음 와인 컬렉션. [사진=박성기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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