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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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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천오백 년의 힙(Hip)한 시간을 걷다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② 편에서 이어집니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거대한 석주에 새긴 민족의 기억

트빌리시 북동쪽 언덕에 자리한 조지아 연대기(Chronicle of Georgia)로 향한다. 복잡하고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마을을 지나 언덕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인다. 넓은 호수인 '트빌리시 해'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고, 거대한 석주들이 우뚝 솟아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바로 조지아 연대기다.

아침인데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많다. 1985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이 거대한 기념물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적이다. 높이 30여 미터에 이르는 열여섯 개의 석주는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신전의 기둥처럼 우뚝 서 있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기둥마다 조지아 왕조의 역사와 성인들의 모습, 성경의 주요 장면이 정교한 부조로 새겨져 있다. 하나의 기둥이 하나의 서사이고, 그 기둥들이 모여 조지아의 긴 역사를 압축해 놓은 거대한 연대기를 이룬다. 기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세밀한 부조를 눈에 담는다. 나라를 세우고 지켜 온 왕들과 성인들의 행적이 돌 위의 부조로 되살아난다. 화려한 장식으로 시선을 끄는 기념물이 아니라, 묵직한 침묵 속에서 민족의 역사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트빌리시 해를 굽어보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트빌리시 해. [사진=박성기 작가]

언덕 끝에 서니 트빌리시 해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멀리 트빌리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어제 걸었던 나리칼라 요새와 메테히 절벽, 쿠라강과 구시가지의 풍경이 희미하게 이어진다.

골목과 언덕을 따라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던 도시는 이제 먼 풍경이 되어 펼쳐진다. 그 안에는 오래된 성당과 붉은 지붕, 강을 건너는 다리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모두 담겨 있다.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트빌리시는 과거와 현재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도시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낡은 공장의 젊은 변신, 파브리카(Fabrika)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젊음의 복합공간 파브리카 트빌리시(Fabrika Tbilisi)). [사진=박성기 작가]

자리를 옮겨 트빌리시의 젊은 문화공간으로 알려진 핫한 파브리카로 향한다.

옛 소련 시절의 낡은 재봉공장을 개조한 파브리카는 구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개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칙칙했던 회색 공장 건물은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그린 감각적인 그래피티와 화려한 벽화로 채워져 있다. 넓은 안뜰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디자인 숍과 트렌디한 독립 공방이 들어서 있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들,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작업하는 디지털 노마드와 예술가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한 공간을 자연스럽게 공유한다. 한때 버려졌던 낡은 공장이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 모습에서 자유로운 젊음과 날것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파브리카 입구의 벽화. [사진=박성기 작가]

안뜰의 벽면을 가득 채운 개성 넘치는 그래피티를 하나씩 둘러본다. 그림마다 색채와 표현 방식이 다르고, 그 속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카페에 앉아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빠르게 흘러가는 여행 속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머무는 이런 느린 시간이 오히려 기억 속에 더 오래, 더 짙게 남았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파브리카 카페. [사진=박성기 작가]

일상의 거리를 걸어 드라이브리지로

파브리카를 나와 드라이브리지 벼룩시장까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평범한 주택가와 작은 공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오래된 아파트 사이를 가로지른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리다. 창문 밖으로 빨래가 걸려 있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낡은 건물과 오래된 나무,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드라이 브릿지 재래시장 모습들. [사진=박성기 작가]

20여 분을 걸어 드라이브리지 벼룩시장에 도착한다. 다리 주변과 공원에는 낡고도 신기한 물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화려한 장식의 브로치와 반지, 다채로운 색으로 수놓은 조지아의 양모 펠트 스카프, 구소련 시절의 훈장과 군복, 배지와 군모가 좌판을 가득 채운다. 그 곁에는 필름 카메라와 축음기, 타자기와 LP 음반, 은식기와 그림, 오래된 책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품은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양모 펠트 스카프(Felt Scarf). [사진=박성기 작가]

그중에서도 조지아 특유의 색과 문양이 담긴 펠트 스카프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쯤 꼭 사고 싶었지만 수중에 남은 돈이 모자라 결국 사지 못했다. 여행지에서는 사지 못한 물건 하나가 오히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도 한다.

시간을 사고파는 시장

이곳에서는 새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물건 하나하나에는 그것을 사용했던 누군가의 삶이 담겨 있고, 세월이 만들어 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낡은 훈장에는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명예와 상처가, 오래된 사진기에는 누군가가 바라보았던 풍경이 담겨 있을 것이다. 빛바랜 책과 음반에도 한 사람의 취향과 추억이 스며 있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공원화가가 그린 그림. [사진=박성기 작가]

그래서 드라이브리지 벼룩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다. 누군가의 지난 시간을 건네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시간을 이어받는 시장처럼 느껴졌다.

길옆 공원에서는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한쪽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보인다. 오래된 골동품과 오늘의 예술이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트빌리시라는 도시를 닮았다.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도시

이틀 동안 걸으며 만난 트빌리시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시오니 대성당과 안치스하티 성당에서는 조지아의 오랜 신앙과 역사를 만났고, 조지아 연대기에서는 한 민족이 간직해 온 기억을 되새겼다. 파브리카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감성을 느꼈으며, 드라이브리지 벼룩시장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온 삶과 추억을 만났다.

트빌리시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중세의 성벽 아래로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오래된 목조 발코니 곁에는 유리와 철로 만든 평화의 다리가 놓여 있다. 낡은 공장은 젊은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오래된 골동품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구시가지의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그래서 트빌리시는 단순히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걸어가는 도시다. 역사는 박물관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거리와 시장, 성당과 광장,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천오백 년의 시간 위에 오늘의 삶과 예술이 겹겹이 쌓여 있는 도시. 그것이 내가 이틀 동안 걸으며 만난 트빌리시의 가장 힙하고도 깊은 얼굴이었다.

조지아 연대기.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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