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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의 물길을 따라 돌아오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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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치밭목·대원사까지
긴 종주의 마지막 걸음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박성기의 도보기행]<9> 종주의 정점 천왕봉에 서다④ 편에서 이어집니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치밭목대피소를 떠나 대원사로 내려가는 길, 숲속에서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갈림길을 벗어나 계곡 쪽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높이 40여 미터의 무재치기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넓은 바위 위로 쏟아진 물은 세 차례 몸을 꺾으며 낙하한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치밭목대피소. [사진=박성기 작가]

수직으로 단숨에 떨어지는 폭포가 아니라 암벽의 굴곡을 더듬듯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폭포다. 물줄기는 하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바위에 부딪친 물방울은 가는 안개가 되어 숲속으로 퍼져 나간다. 햇살이라도 스며들면 그 물안개 속에 작은 무지개 하나가 걸릴 듯하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치밭목에서 내려가기 시작한다. [사진=박성기 작가]

무지개가 피어나는 폭포여서 무재치기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맑은 공기 덕분에 재채기마저 멎는 곳이라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종주로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무재치기 폭포의 물소리가 씻어준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장엄한 산의 기운이 이곳에 이르러 맑은 물이 되고, 하얀 물보라가 되어 대원사계곡으로 흘러내린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40미터가 넘는 무재치기폭포. [사진=박성기 작가]

대원사계곡이다. 천왕봉에 내린 눈과 비에서 시작된 물은 수많은 바위를 만나고 수많은 굽이를 돌아 이곳까지 흘러온다. 맑은 물은 바위와 부딪치고 어루만지며 하얀 포말을 만든다. 그 소리는 사흘 동안 몸에 쌓인 피로와 통증을 씻어주는 위로의 음악처럼 들린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5.툭 튀어나온 이파리가 신기하다. [사진=박성기 작가]

유평리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길이 남아 있다. 유평리에서 대원사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하지만 모든 힘을 쏟아낸 나에게는 짧지 않은 거리다. 발은 무겁고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이상할 만큼 가볍다. 더 이상 넘어야 할 고개도, 올라야 할 봉우리도 없다. 이제 지리산이 흘려보내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계곡의 바위에 잠시 앉아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다. 그 물은 천왕봉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돌과 시간을 지나 내 손끝에 닿는다. 문득 나의 걸음도 그 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성삼재에서 시작한 걸음은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 환희와 고통을 지나 이곳까지 흘러온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대원사 대웅전 [사진=박성기 작가]

그리고 마침내 대원사 일주문 앞에 선다. 일주문은 절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지만, 오늘 나에게는 지리산의 거대한 세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경계다.

배낭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다. 성삼재에서 시작해 천왕봉을 지나 이곳까지 나를 품어주고 때로는 시험한 42km의 지리산 종주가 마침내 끝난다. 수십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 거친 돌길에서 흘린 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던 순간, 별빛 아래 맞은 고요한 밤, 천왕봉에서 마주한 붉은 새벽까지 모든 순간이 하나의 긴 시간으로 남는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대원사 일주문 [사진=박성기 작가]

대원사 일주문을 나서며 비로소 지리산 성대종주의 긴 여정이 끝난다. 성삼재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뒤 노고단과 삼도봉, 연하천과 벽소령, 세석과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에 올랐고, 다시 중봉과 치밭목을 거쳐 이곳까지 걸어왔다. 2박 3일 동안 수많은 봉우리를 넘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왔지만, 정작 내가 넘어온 것은 산만이 아니다.

젊은 날 수없이 오르내리던 지리산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걷는 동안, 산속 어딘가에 두고 온 옛날의 나를 다시 만난다. 겁 없이 산을 누비던 청년과 세월의 무게를 등에 지고 걷는 지금의 내가 능선 위에서 잠시 마주 선다. 달라진 것은 많지만 지리산은 여전히 깊고 넉넉하며 말없이 나를 품어준다.

지리산의 능선과 숲, 바람과 물소리는 오래도록 내 안에서 이어질 것이다. 다시 만난 지리산은 젊은 날의 나를 돌려주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필요한 고요와 용기를 함께 건네준다.

하산길.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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