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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9> 종주의 정점 천왕봉에 서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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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지나⋯장엄한 일출 맞이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 연하선경, 하늘과 맞닿은 길③ 편에서 이어집니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새벽 3시 30분, 장터목대피소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된다. 어젯밤 함께 피곤한 몸을 뉘었던 사람들은 말없이 배낭을 정리하고 헤드랜턴을 머리에 올린다. 밤하늘의 별빛마저 희미한 산중에서 하나둘 켜지는 불빛은 마치 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내려와 산길을 오르는 듯하다.

새벽 3시 50분, 드디어 마지막 여정이 시작된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약 1.7km다. 거리로만 보면 짧다. 그러나 지리산은 쉽게 정상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거친 돌계단과 바위길, 숨을 몰아쉬게 하는 오르막이 계속된다. 어둠 속에서는 멀리 볼 수 없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작은 빛의 원 안에 있는 돌 하나, 계단 하나만 보일 뿐이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사진=박성기 작가]

제석봉의 고사목은 새벽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제석봉을 지나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시간이 흐르면서 캄캄하던 길은 서서히 밝아지고, 천왕봉은 그 너머의 여명 속에서 짙은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곧 일출이 시작되기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통천문을 지나 마침내 해발 1,915m, 천왕봉(天王峰)

밤의 어둠이 아직 산허리에 머물러 있을 때, 동쪽 하늘 끝에서 붉은 덩어리 하나가 세상을 불태우듯 솟아오른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에 불과하던 빛이 순식간에 하늘을 밀어 올리고, 이내 둥근 해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장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천왕봉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해가 떠오르니 하늘과 땅이 한순간에 깨어난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첩첩 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천왕봉을 향해 장엄하게 도열한다. 가까운 산은 짙은 먹빛으로 서 있고, 멀리 이어진 산줄기는 옅은 수묵의 농담이 되어 하늘 끝까지 번져 간다. 첩첩이 포개진 능선은 거대한 동양화 한 폭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어느 화가가 이런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이 이 순간을 온전히 노래할 수 있을까. 사진 한 장에도, 한 줄의 문장에도 다 담을 수 없는 장엄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천왕봉의 일출은 단순히 해가 떠오르는 광경이 아니다. 긴 어둠을 견디고 걸어온 사람에게 지리산이 허락한 축복이다. 그리고 그 빛은 산을 밝히기 전에 먼저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비춘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일출을 맞이하는 등산객들.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은 가장 찬란한 선물을 보여준 뒤에도 쉽게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다. 진짜 마지막 시험은 천왕봉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중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급한 내리막과 거친 돌길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하늘의 왕좌에 서 있었다면, 이제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 [사진=박성기 작가]

천왕봉을 뒤로하고 대원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중봉(1,874m)에 선다. 방금 떠나온 천왕봉이 가장 위엄 있는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천왕봉이 지리산 최고봉으로 천하를 굽어본다면, 중봉은 오랜 세월 바로 곁을 지켜온 봉우리다.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지만 천왕봉에 가려 그저 중봉이라 불린다. 그러나 중봉에 서서 바라보는 세상도 장엄하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중봉에서 바라본 첩첩산중.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의 마지막 고행은 이제부터다. 써리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산은 마지막 남은 힘까지 꺼내놓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내려섰다고 생각하면 다시 올라야 하고, 봉우리를 넘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골짜기가 기다린다. 거친 돌길과 너덜지대, 급한 경사가 반복된다. 도대체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넘었는지 기억조차 흐려진다.

다리는 이미 내 다리가 아니다. 허벅지는 돌처럼 굳어가고 무릎은 조용한 비명을 지른다. 발바닥은 지리산의 돌 하나하나를 기억할 만큼 아려온다. 배낭의 무게보다 지친 몸 자체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묻는다. "아직도 멀었는가". 그러나 산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묵묵히 다음 발걸음을 놓을 자리를 내어줄 뿐이다. 이 외로운 길에서 풀려가는 다리를 달래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진짜 종주의 시간이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중봉의 철쭉. [사진=박성기 작가]

써리봉을 지나 치밭목대피소에 닿는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러나 길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의 물길을 따라 돌아오다⑤ 편으로 이어집니다

천왕봉의 일출.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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