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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 천왕봉 가는 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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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대종주, 산이 내 안을 지나간 시간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지리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영산이다. 오래전부터 사람을 품어온 산이다. 지리산을 오르는 모든 이는 길 위의 동행자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쉼터이고, 수행하는 이에게는 깨달음을 구하는 곳이며,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는 수많은 이의 눈물이 밴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대학에 막 입학하던 해, 처음 지리산을 만났다. 이후 수십 번을 오르내리며 지리산의 품을 누비다가, 어느 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전국의 산과 길을 찾아다녔고, 지리산둘레길도 걸었지만, 정작 지리산 능선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앞에 선다. 오랫동안 오르지 않은 산이어서 가슴은 더 세차게 뛰고 마음은 벅차오른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다시 지리산 품으로-성삼재에서 연하천까지, 오래된 그리움과 다시 만난 길

오전 10시 30분, 등산화 끈을 조이고 길을 나선다. 짙은 운무 때문에 오늘의 길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기예보를 믿고 노고단을 향해 천천히 고도를 높인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성삼재. 구름이 잔뜩 끼었다. [사진=박성기 작가]

걷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몸과 대화하는 일이다. 숨이 가쁘면 속도를 늦추고, 어깨가 무거우면 잠시 쉬며 배낭을 고친다. 발밑의 흙과 돌, 나무뿌리의 굴곡, 땀을 식혀주는 바람까지 모두 길이 들려주는 언어가 된다. 노고단은 지리산의 오랜 신앙이 깃든 곳이다. 노고단고개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지만, 안개에 가려 맑은 날이면 보이는 반야봉도 모습을 감춘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노고단고개. 천왕봉 가는 길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은 기암괴석과 날카로운 암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깊은 숲과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으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될수록 다리는 조금씩 무거워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몸이 지칠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진다. 불필요한 생각은 숲길 어딘가에 내려놓고, 남는 것은 나의 호흡과 발걸음뿐이다.

노고단고개에서 임걸령까지는 약 3.5km다. 고개를 넘어서니 기대했던 능선은 안개 속으로 숨는다. 지리산 종주의 시작은 의외로 조용하다. 숲은 깊고 길은 부드러우며, 나무 사이를 흐르는 안개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며 앞을 안내한다. 문득 안개가 열려 잠시 걷는 이의 갈증을 풀어주고는 이내 다시 문을 닫는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돼지령 [사진=박성기 작가]

돼지령을 지나며 완만하게 오르내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새소리가 고요를 깨뜨릴 때마다 잊고 있던 지리산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며 서둘러 걸었지만, 이제는 숲의 냄새와 살갗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걷는다.

피아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면 임걸령이다. 임걸령 샘 앞에 잠시 서서 차갑고 맑은 물 한 바가지를 마신다. 산에서는 물 한 모금이 단순한 갈증 해소가 아니다. 지친 몸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의 물이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임걸령 샘물 [사진=박성기 작가]

임걸령을 뒤로하고 노루목으로 향한다. 길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쉼 없이 이어진다. 어깨에 멘 배낭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묵직해진다. 배낭은 무거워지는데 마음은 가벼워진다.

노루목을 지나 삼도봉(1,499m)에 선다. 삼도봉은 전북 남원·전남 구례·경남 하동이 맞닿는 지점이다. 삼도봉 표지석 앞에 서자 바람이 구름을 세게 밀어낸다. 순간 지리산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 이래서 지리산이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다시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와 모든 것을 가려버린다. 삼도봉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경계가 무색하다. 도의 경계도, 사람의 차별도 없다. 바람과 구름이 머무는 하늘만 있을 뿐이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화개재. [사진=박성기 작가]

삼도봉을 지나 길게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계단을 따라 화개재로 향한다. 거리는 짧지만 무릎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한참을 내려서니 넓고 평평한 화개재(1,315m)가 모습을 드러낸다. 화개재는 예전에 하동과 남원을 오가며 교역하던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소금과 해산물을 짊어진 장꾼이 된 듯 화개재를 넘는다. 고단한 발걸음 사이로 아리랑 한 자락을 흥얼거린다. 봇짐꾼들의 노래는 숨 가쁜 오르막에서 발걸음을 맞추고 먼 길의 고단함을 달래주었으리라.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토끼봉 [사진=박성기 작가]

화개재를 지나 토끼봉(1,534m)으로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이다. 숨을 몰아쉬며 봉우리에 올라선다. 몇 시간을 걸어온 다리가 무겁다. 배낭끈은 어깨 깊숙이 파고든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땀이 온몸을 적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조금 전까지 힘겹게 넘어온 능선은 어느새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나를 배웅한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연하천산장 [사진=박성기 작가]

시간은 어느새 오후를 지나 저녁으로 기울어 간다.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점점 길어지고, 바람은 낮의 열기를 내려놓으며 차가운 산의 숨결을 데려온다. 새들의 울음도 잦아들고 숲은 천천히 저녁의 침묵으로 들어간다. 명선봉(1,586m) 정상을 직접 넘지 않고 남사면을 돌아 내려가 오후 6시,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한다.

안개와 노을이 머무는 샘이라는 이름처럼 연하천(煙霞泉)은 해발 1,400미터가 넘는 고지에 있는데도 물이 풍부하다. 대피소의 작은 불빛 아래 낯선 사람들이 둘러앉아 저마다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는다. 식사를 마치니 사방이 어두워지고 수많은 별이 쏟아진다. 도시에서 잃어버렸던 별들이 이 깊은 산속에서 다시 제 모습을 찾는다.

[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 능선을 걷다② 편으로 이어집니다

지리산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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