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하늘은 푸르고 봄의 향기를 품은 공기는 달다. 안국역 6번출구 옆 북인사마당에 서면 고층 빌딩 유리벽에 일렁이는 깊은 하늘이 북촌의 하루를 미리 예고하는 듯하다. 북촌을 걷는다는 것은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거꾸로 거스르는 일이다. 현대의 틈새로 과거가 불쑥 얼굴을 내미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시간의 경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북촌은 서두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대신 골목 하나, 담장 한 면, 오래된 이름 하나를 느리게 내어주며 걷는 자의 보폭을 조절한다. 그 느릿한 드러남 속에서 길은 비로소 풍경을 넘어 이야기가 된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ea9959b0dd31db.jpg)
닫힌 담장을 넘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
소나무가 깃든 지명은 우리 산천 어디서나 정겹다. 송현(松峴) 또한 그렇다. 안국동에서 경복궁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소나무가 울창해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백 년 넘게 높은 담장 속 '금기(禁忌)의 땅'으로 남아 있다가, 마침내 담장을 허물고 제 이름을 되찾았다.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사택에서 미국 대사관직원 숙소로, 오랫동안 이방의 공간으로 떠돌던 북촌의 앞마당이 이제야 본래의 주인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95ab3f1663bf51.jpg)
계절의 빛을 머금은 꽃들이 한창인 송현에는 그 꽃을 닮은 연인들이 손을 맞잡고 거닌다. 아직은 잎이 성글지만, 머지않아 온갖 화초와 푸른 기운으로 환하게 물들 것이다. 오래 닫혀 있던 자리가 다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간은 충분히 아름답다. 북촌으로 들어서기 전, 이 넓은 광장은 여행자에게 한 호흡 크게 가다듬고 길을 시작하라는 다정한 권유처럼 다가온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69f64a56a4e33e.jpg)
맞은편 서울공예박물관 자리는 본래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집터였고, 고종 때 가례를 위해 지은 안동별궁이 있던 곳이다. 한때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끊이지 않던 풍문여고의 터가 이제는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고, 흙을 빚고, 나무를 다듬던 무명 장인들의 혼신이 이 터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왕실의 공간이자 근대 교육의 현장이었으며, 오늘날 공예의 집이 되었으니 한 터가 품은 시간의 켜가 놀랍도록 두툼하다. 마당의 늙은 은행나무는 그 모든 세월을 지켜본 증인으로 지나는 이들에게 묵묵히 그늘을 내어준다. 예나 지금이나 그늘은 사람을 쉬게 하고, 나무는 말이 없다.
소금빵의 향기와 대문의 침묵
공예박물관을 지나 북촌의 속살로 들어가는 길목, 고소한 유혹이 먼저 발길을 붙잡는다. 갓 구워낸 소금빵과 베이글의 향기는 걷는 자의 허기를 다정하게 건드린다. 소금빵 한 조각으로 시장기를 달랜 뒤 비로소 북촌의 깊숙한 곳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519227b623131e.jpg)
인파로 북적이는 골목 너머로 북악산의 능선이 북촌의 거대한 지붕처럼 펼쳐진다. 사람들은 그 지붕 아래로 실핏줄 같은 골목을 타고 흐르는데, 그 풍경이 사뭇 경이로워 한참을 서서 바라보게 된다. 한 마을을 덮고 있는 산의 품이란 저런 것일까. 북악은 북촌을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산이 아니라, 조용히 감싸 안아주는 든든한 배경이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287fe751946efa.jpg)
덕성여고와 선학원의 고즈넉한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윤보선 전(前) 대통령 가옥의 육중한 대문과 마주한다. 구한말과 현대 정치를 잇는 그 대문 맞은편에는 조선어학회 터를 알리는 작은 표석이 놓여 있다. 격랑의 현대사를 품은 정치적 상징과 우리말을 지켜낸 민족적 지조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한쪽에는 살아낸 삶의 무게가, 다른 한쪽에는 지켜낸 말의 무게가 놓여 있다. 북촌의 골목은 이토록 좁은 틈 안에 묵중한 시간을 접어 넣고 있다.
굳게 닫힌 윤보선 가옥의 담장을 넘겨다보려 발꿈치를 들어보지만 내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흔아홉 칸 한옥의 기품과 조선 정원의 정취를 보고 싶은 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아래 감고당길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길거리 음식 앞의 긴 줄과 닫힌 대문의 적막이 한자리에 겹쳐 있는 풍경이 묘하다. 북촌은 늘 이런 식이다. 고요와 소란, 기억과 현재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동거한다.
붉은 벽돌에 기대어, 사색의 정원을 거닐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8a372cfd9824a5.jpg)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경기고등학교 자리였던 정독도서관에 이르면 붉은 벽돌의 교육박물관이 전하는 근대 건축의 단단한 품격이 먼저 다가온다. 경기고등학교 본관 건물이던 교육박물관을 돌아들면 꽃과 나무 사이로 휴식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 평화로움은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도서관이 귀하던 시절, 이곳은 누군가에게 치열한 꿈의 현장이었을 터다.
도서관 마당 벤치에 앉아 있으면 담장 밖의 소음조차 활자가 되어 내려앉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책을 읽는 이들의 침묵과 나무 아래 쉬는 사람들의 기척이 뒤섞인 이곳은, 단순한 공공건물을 넘어 도심 속 사색의 정원이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29813653363a46.jpg)
가회동 언덕에 자리한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가옥은 전통 한옥의 골조에 근대의 감각을 덧입힌 북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복도, 유리창과 붉은 벽돌은 옛 질서 안으로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스며든 흔적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정원을 바라보면 번잡한 상념은 가라앉고 오직 고요만이 남는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빈 공간을 채우고, 마당의 햇살은 걷는 자의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이 집의 정원은 유난히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힘이 있다.
[박성기의 도보기행]<5> 발끝으로 읽는 서울⋯북촌을 걷다(하)로 이어집니다
![북촌 골목길.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419ce7604e4a5f.jpg)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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