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매력은 노골적인 뻔뻔함?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 여자는 은밀한 매력이 아니라, 노골적인 뻔뻔함이 매력이라니까요"
그렇게 당돌한 대답으로 문소리는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한 번쯤 이런 영화가 나와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 역할을 선택했다는 그는 영화(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를 마친 인터뷰에서 생각보다 한층 느긋하고, 그만큼 초조해 보였다. 자신이 봐도 '이거 웃기는 녀석들이네'라고 생각한 인물을 이제 막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인지, 출산의 고통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내놓은 아이가 다른 이의 눈에 영 밉상으로만 비치지 않을까 초조하고 아릿해 하기도 했다.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감독 이하)에서 문소리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없었다'고 본인이 선언한 도발적인 여교수 은숙을 연기했다. 영화 '박하사탕'의 윤순임부터 '오아시스'의 불구의 몸에 꺽이지 않는 영혼을 가졌던 공주를 거쳐 '바람난 가족'의 '넌 아웃이야'라고 가차없이 선언하던 냉혹한 호정까지 그가 맡은 역할은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번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가식으로 똘똘 뭉쳐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 5명을 희롱하는 여왕벌같은 여자 은숙은 확실히 문소리에게도 낯선 캐릭터였다.

여자가 뭘 원하는지 알기나 해?
"그 여자는 남들에게 보이는게 다예요, 주체적으로 뭘 바라고 해결하는 용감한 인물이 아니라, 남들에게 바라봐지는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죠. 자기가 뭘 원하는지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민감하고 더 중요하죠. 자기가 남에게 보이는 모습만을 신경쓰고 연출하는 여자예요."
남들이 보기에는 무엇하나 빠질 것 없는 지방대 염색과 교수는 환경운동단체의 장으로 활동하며 자신을 숭배하는 5명의 유부남 사이를 오가며 거침없이 그들과 섹스에 탐닉한다. 그 나름으로는 평화로운 일상이 자신의 중학 시절 좀 놀았던 과거를 아는 남자 석규(지진희)가 출연하면서 은숙는 정신없이 허둥대기 시작하고 코미디와 냉소의 변주가 시작된다.
"웃기지만 또한 웃을 수 만은 없는 이야기죠.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껏 우하하 웃을 수 없는 것은, 웃는 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잘 알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러러면 저 가식을 나 역시 알고 있고, 내 안에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니까. 부정적이고 삐딱하니까 발게 웃을 수 만은 없죠. 그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웃을 수 없지만 웃긴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문소리는 작은 질문 하나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웃긴 것들이란 은숙에 대한 애정 역시 숨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낯설고 거부로 시작됐지만,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자기 안의 괴물을 바라보듯 그는 담담하게 여교수 은숙에 대해 설명한다.
그 여자가 안쓰럽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웃기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여자가 안쓰럽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아직도 그 여자가 혼자 삐져서 차가 안다니는 국도를 찔뚝찔뚝 거리며 걷던 뒷 모습이 생각나요. 시나리오에서는 설명되지 않지만 그 여자는 조금 다리를 절거든요. 감독님이 '왜 그럴 것 같아요?'라고 먼저 선방을 치는데, 아마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봐서 그렇지 않겠냐 답했죠. 그런게 있어요. 그 여자의 내면은 황폐하기 이를데 없는데 자기는 꿋꿋이 잘 산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순진하게도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면서도 자기는 잘 산다고 믿는 그 모습이 안쓰럽고, 그리고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인생을 찔뚝찔뚝 거리며, 초조해 하면서, 또 나름으로는 잘 살아간다고 자위하면서 걷는 그 교수의 모습에 쉽게 웃음을 터뜨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도 자기 안에 그만큼의 가식과 허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5명의 남자를 오가는 그 걸쭉한 한판 연애 굿이 사랑은 아닌듯 해 내심 걸린다.

"사랑이 아니라, 어떤 나르시즘 같은 최면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해요. 순간순간 그 최면이 빠지는 것이 무섭고 두렵지만,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독한 전염력이 있는 최면이죠. 그 여자가 그렇게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데 주위 남자들이 어떻게 최면에 깨겠어요? 저는 살면서 그런 최면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본 것 같아요."
그 대목에서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배우라는, 혹은 스타라는 직업이 우리 일상의 나른함과 구차함에 눈을 가리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또 다른 환상에 대해 최면을 거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최면으로 유도하며 일순간의 환상을 제공하는 그 직업인 듯 하지만, 문소리는 냉정하게 선을 가른다.
번쩍 번쩍 엉덩이를 한대 갈긴다?
"어느 한 순간 내가 최면에 걸릴 까봐 그런 나 자신을 번쩍 번쩍 엉덩이를 한대 갈겨요. 배우들은 화려한 옷, 비싼 차 등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그것들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사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면 그 때 문소리는 어떻게 해? 그냥 울어? 나는 최고 여배우인데 왜 너희들이 이러는 거야? 라고 한탄해요? 아니거든요."
그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했던 '박하사탕' 이야기를 하며 여배우의 자기 최면이 얼마나 위험한지 들었다고 설익은 웃음을 짓는다. 그에 따르면 갑자기 비행기 띄우는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이고, 나중에 그 비행기가 멈추면 떨어져서 대가리 깨지고 혼자 남는 것도 자신이기 때문에 속이 단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떻게 보면 존경스럽고 어떻게 보면 안쓰러울만큼의 자기 방어는 어디서 생겼을까?
"나는 그래요. 누구나 많이 경험했겠지만 자기 안이 단단해지지 못하고, 속으로 단단해지지 못하면 언젠가는 무너지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 영화 속의 가식 차리는 은숙이 때로는 더 화려하게 자기 원하는 것을 했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까벌리지 못하는 모습을 그 여자는 너무 위태하게, 노골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요." 배우를 인터뷰 한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단순히 연기나 흉내가 아니라, 한 캐릭터 자체가 되서 그 깊은 생의 바닥까지 쳐놓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한 배우를 인터뷰 한다는 것은 깊은 심연 속으로 잠수 하기 전의 해녀만큼 긴장된다. 그러니까 문소리, 그를 화면에서 만나기 전, 그가 이 영화에서 그 웃기는 캐릭터를 그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캐릭터로 껴안을 수 있을 만큼의 고민을 이해하기 전, 그 자체 만으로 만나는 것도 때로는 숨이 필요 하다.
"어느 한 순간 그 분이 오신다니까요. 정체가 불분명하고, 술 많이 마셔도 가끔 오시고, 마지막 촬영 할때도 오는 그 분이 있어요. 신들린 연기라고 굳이 말 안해도, 영화 속에 은숙이 마지막 실랑이 씬을 벌일 때, 뭐라고 진짜 인간들 저질이야라고 외치거든요. 그게 아마 내가 이 영화 찍으면서 쭉 느겼던 느낌이었나 봐요. 그러니까 그 분이 오실 때 나도 살겠죠?
문소리가 이번 영화에서 어떤 그의 모습을 보여줬는지, 그에 대한 호불호는 영화를 본 사람의 몫이다. 혹은 이 시대의 가식에 대해 심호흡 하며 쓴 웃음을 머금는 당신의 몫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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