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의 숨이 가늘어지고, 새해의 기척이 문밖에서 서성인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이 맞닿는 자리에서 산으로 향한다.
명성산은 이름부터 귀에 와 닿는다. 울 명(鳴), 소리 성(聲), 울음의 산이다. 전설은 궁예의 최후를 이 산에 묶어 두었다. 패자의 통곡이 능선을 울렸다고 하고, 산새들이 슬피 울어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산 능선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바람처럼 맴도는 듯하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32df21b3a48f9a.jpg)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1509d4019540e7.jpg)
산정호수에서 출발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얼음의 흔적이 수면 위에 남아 있고, 얼다 만 물빛이 낮은 햇살을 받아 흐릿하게 빛난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숨 고르기처럼 느껴진다. 계곡을 곁에 두고 산길을 올랐다. 차가운 기운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계곡은 여전히 겨울을 품고 있어 물이 꽁꽁 얼어 있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31655c70a6bbe2.jpg)
등룡폭포에 닿았다. 한때 거친 숨으로 내달렸을 물줄기는 지금 고요하다. 낙차의 형상으로 굳어버린 얼음기둥이 매서운 겨울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 아래로 물이 몰래 흐른다. 이따금 얼음장 밑에서 물소리가 새어 나와 걷는 자의 귀를 간지럽힌다. 겉은 멈춘 듯 보이나 속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얼음과 물이 한 몸으로 겨울을 건너는 중이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b09c1c1b7d0f9b.jpg)
등산로 입구에서 승진훈련소 초소까지 2.5km는 완만했다. 그러나 갈대밭 입구까지 1km는 너덜지대다. 크고 작은 돌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녹다 만 눈이 얇은 막처럼 바위를 덮어 미끄럽다. 이런 길에서 발걸음은 자주 멈춘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몸의 중심을 낮춘다. 산은 서두르는 이에게 관대하지 않다. 발끝에 신경을 모으면 길은 비로소 열린다.
억새밭에 들어섰다. 명성산의 억새는 지난 가을의 화려함을 내려놓았다. 은빛 물결 대신 빛바랜 줄기들이 능선을 덮고 있다. 그러나 퇴색은 초라함이 아니다. 비워낸 자리에서 오히려 단정한 기운이 감돈다. 억새는 말없이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4aa1615e5350bd.jpg)
팔각정 전망대에 섰다. 먼 산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억새평원은 적막하다. 몇몇 등산객이 스쳐 지나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바람이 멈추자 억새는 잠시 숨을 죽인다. 바람이 불어오면 마른 억새는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사삭, 사삭. 낮은 마찰음이 번진다. 산이 숨 쉬는 소리 같다.
팔각정에서 명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가파르다. 하늘은 호수처럼 맑고 쨍하다. 칼끝처럼 날 선 산길에 잔설은 걷는 자의 발밑을 시험한다. 능선은 낮게 숨을 고르듯 오르내리며 고도를 다듬는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정호수가 아스라하다. 명성산의 울음을 받아서인지 호수는 햇빛에 반짝이며 산의 속내를 가만히 비추는 듯하다. 바람과 함께 선 나목은 산등성을 따라 고개 숙인 억새를 굽어보며 등반자를 전송한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2585aced7a5bbb.jpg)
삼각봉을 지나 923미터 정상까지 가는 동안 능선 좌우로 보이는 풍경이 걷는 자의 마음을 한없이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능선에는 눈이 반쯤 녹아 더 미끄럽다. 내딛는 발걸음이 자꾸 밀려 내려가 조심스레 몸을 낮춘다. 밧줄을 잡아야 하는 구간도 있다. 숨이 거칠어지고 허벅지에 힘이 찬다. 고개를 들면 능선이 이어지고, 숙이면 눈과 돌이 발끝에 놓여 있다.
산길을 따라 어느새 발걸음은 정상에 닿았다. 신안고개로 내려가려 했으나 하산길이 험하고 눈도 녹지 않아 원점 회귀하기로 했다. 산에서는 고집보다 물러섬이 지혜일 때가 있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8badb9bd9e0219.jpg)
명성산은 포천과 철원의 경계에 서 있다. 명성산을 품은 산정호수는 포천이고 정상은 철원이다. 그러나 바람은 경계를 모른다. 억새도, 눈도, 구름도 어느 편을 택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갈 뿐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궁예의 통곡은 들리지 않고, 바람과 억새의 숨이 산을 감싸고 있다. 지나간 날들의 기쁨과 미련, 후회와 다짐을 털어놓았다. 정상은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다. 다시 내려가기 위해 잠시 멈추는 자리임을 산은 조용히 일러 준다. 첩첩의 먼 산을 바라보며 잠시 명상에 빠졌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8648894626bdb0.jpg)
시간이 늦어 오래 쉬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명성산 억새의 감동과 칼끝 같은 능선을 즐기느라 시간을 많이 써 하산할 여유가 짧다.
하산길은 올라오며 보지 못한 또 다른 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팔각정을 지나 다시 억새 평전을 지나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초소에 다다를 때 랜턴을 켰다. 점점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발자국 소리가 정적 속으로 파고들었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더니 인가가 나타났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598b8e9f928fce.jpg)
지난 시간의 다사다난함은 오늘 명성산에 살풀이하듯 털어놓고 왔다. 한 해 동안 묵은 서운함과 억울함, 말로 풀어내지 못한 진심, 스스로에게 남겨 둔 미련과 자책까지도 능선의 바람에 실려 보냈다. 울음의 산은 내게 씻김이 되었다. '첫'이라는 설레는 말을 잘 간직하고 병오년을 시작해야겠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겹겹한 산 [사진=박성기]](https://image.inews24.com/v1/419ce7604e4a5f.jpg)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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