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진영 기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장에서 보길 강력 추천한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역사가 따뜻한 시선으로 펼쳐지는 동시에 배우들의 묵직한 열연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정말 티켓값과 117분이라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왕과 사는 남자'다.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다. 탁월한 스토리텔러 장항준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대한민국 영화 누적 관객수 1위 배우인 유해진과 대세 배우 박지훈이 각각 광천골 촌장 엄흥도와 단종 이홍위 역을 맡았다. 여기에 유지태, 전미도, 이준혁, 박지환, 안재홍 등이 함께해 완벽한 앙상블을 선사한다.


조선 6대 왕 단종, 이홍위는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어 17세에 생을 마감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손이었다가,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문종의 세자였다가, 즉위와 함께 암투에 내던져진 어린 왕이었던 단종 이홍위는 끝내 왕위를 찬탈당한다. '왕과 사는 남자'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 없을 어린 왕 이홍위(박지훈 분)가 1457년 궁을 떠나 영월 산골 마을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르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는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유배를 왔던 높은 관료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글을 배우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 어렵게 꿈을 이루는 듯했으나, 엄흥도가 맞이한 이는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였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그의 모든 일상을 감시해야 했던 엄흥도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이홍위가 점점 신경 쓰인다. 그러던 중 이홍위가 호랑이에게서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사건이 생기고, 이후 이홍위와 엄흥도는 신분을 뛰어넘어 끈끈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왕과 사는 남자'로 사극 첫 도전에 나선 장항준 감독의 선택은 영리했다. 그간 계유정난 전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에만 집중했던 것과 달리 왕위를 빼앗긴 후 이홍위의 삶에 주목한 것. 이에 실존 인물인 엄흥도가 등장하게 됐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인간애, 희로애락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장항준 감독의 따뜻한 시선 속 이홍위는 '비운의 왕'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왕의 기개가 넘치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군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장항준 감독은 "단종이 나약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총명하고 세종에게 사랑받았고 신료들도 성군이 될 자질이라고 기대했던 분이다"라며 "패배자는 나약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나약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패배한 사람의 뒷면, 아무도 보지 않으려 하고 비추지 않았던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잊혀진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 후대가 할 일"이라고 지금껏 그려지지 않았던 단종의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이야기의 탄탄한 뼈대 위 살을 붙이고 매력을 더한 건 배우들의 힘이다. 유해진과 박지훈, 전미도, 유지태, 이준혁 등 캐스팅 발표 당시에도 놀라운 라인업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캐스팅을 할 수 있었나 감탄만 하게 된다. "캐스팅이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던 장항준 감독의 '인복'이 제대로 빛을 발한 것. 우스갯소리로 "장항준 감독은 배우들에게 절을 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모든 배우가 맞춤옷을 입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대체불가다.
엄흥도와 단종의 환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해진과 박지훈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큰 영화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매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촌장으로 변신한 유해진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인간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이홍위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표현해내 관객의 마음을 사정없이 울린다. 촬영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지만, 울기도 참 많이 울었던 유해진이다. 모든 것을 걸고 단종을 보필했던 엄흥도처럼, 박지훈을 끔찍이 아꼈던 유해진은 진심이 가득 담긴 혼신의 열연으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명장면을 완성했다.
박지훈은 첫 등장부터 단종 그 자체가 되어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왕과 사는 남자' 이전 '약한영웅' 시리즈의 연시은으로 "20대 배우 중 최고의 연기", "눈빛만으로도 모든 감정을 담아낼 줄 아는 배우"라는 평가를 얻었던 박지훈은 이번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배우로서 더 깊어지고 묵직해졌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건 영광스럽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단종이기 때문에 박지훈이 느끼는 압박감은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분명 단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박지훈은 결국 해냈고 기대 이상의 단종을 탄생시켰다. "아름다운 고통"이라는 박지훈의 표현처럼, 너무나도 처연하고 슬프고 애틋한 단종이 스크린을 꽉 채운다. 15kg 감량, 완벽한 국궁 자세, 백 마디 말보다 강한 힘이 있는 눈빛, 감정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 끝까지 잃지 않는 기품 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박지훈이 더 놀라운 건, 관록의 배우 유해진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너무 앞서지도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딱 알맞은 감정의 온도로 밸런스를 유지한다. 박지훈을 앞에서 단단하게 끌어주는 유해진, 그런 유해진을 바라보며 눈빛과 표정으로 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박지훈, 두 사람의 환상적인 연기 호흡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이홍위를 보필하는 궁녀 매화는 전미도의 끝없는 고민과 노력 끝에 마지막까지 진한 여운을 남기고, 유지태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의 한명회를 그려내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여기에 금성대군 이준혁, 엄흥도의 아들인 태산 역 김민 등도 분량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초반 엉성한 CG와 뚝뚝 끊기는 음악 활용은 초반 몰입을 살짝 방해한다. 하지만 이것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왕과 사는 남자'가 가진 미덕이 훨씬 크고 대단하다. 특히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따뜻한 메시지의 웰메이드 사극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한국영화 침체기를 이겨낼 계기가 마련된 것 같아 기분 좋은 기대를 걸게 된다.
2월 4일 개봉. 러닝타임 117분. 12세이상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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