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2023년 가을, 뉴욕 Focus Art Fair 전시장 한복판. 화려한 색채와 설치미술이 난무하는 가운데, 조용한 숨결처럼 관람객을 끌어당기는 공간이 있었다.
동양화가 홍푸르메 작가의 먹 작업 부스였다. 그곳에서 조용히 붓을 잡은 채 관람객을 맞이하던 작가의 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의 침묵을 간직한 사람처럼 고요하고 단단했다. “먹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고의 깊이, 명상의 깊이, 존재의 무게를 담는 색이죠.” 홍푸르메 작가에게 먹은 단지 화구(畫具)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도구이며, 수행(修行)과 명상(冥想) 그 자체다. 오는 9일부터 11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아트부산에 참가하는 홍푸르메 작가를 만나보았다.

“다시 태어나도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라는 동양화가 홍푸르메 작가의 말에는 30년 예술 인생의 고요하고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다.
수묵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동양화가 홍푸르메 작가는, 지난 30여 년간 먹과 화선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치유와 성찰을 이야기해 왔다.
특히 뉴욕, 제네바, 런던 등 해외 아트페어에서 '현(玄)의 색'으로 불리는 먹의 깊이를 표현한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치유(治癒)의 미학(美學)’으로 주목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회화를 넘어,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과 명상적 체험을 안겨준다.
홍 작가는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먹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수양(修養)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껏 먹 작업에 임해왔습니다.” 직접 설계한 붓으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그녀의 작업은 수백 번, 때로는 수천 번에 걸친 붓질을 통해 만들어진다. 종이와 먹, 여백과 먹물이 이루는 긴장과 해방은, 관람객에게 무언의 위로를 건넨다.
어린 시절, 그림과의 운명적 만남
어린 시절 그는 병약한 몸을 안고 자연과 고요한 시간을 벗 삼았다.
전국 사생대회를 따라다니며 빵과 우유를 받는 즐거움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차츰 붓은 그의 친구가 되었다. 자라나며 반복되는 병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고, 도라지꽃과 들풀을 벗 삼아 성장했다.
고등학생 시절, 야외 스케치를 하던 중 한 낯선 행인이 “그림이 참 좋네요”라고 건넨 한마디가 그림을 향한 열정에 길을 열었다고 한다. 익명의 시선으로부터 처음 얻은 ‘진짜’ 인정이었다.

먹과의 인연: 반항에서 철학으로
대학 시절 대부분이 서양화를 택하던 분위기 속, 그는 “우리 것도 모르면서 남의 것만 좇는 게 싫었다.”라며 동양화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 접했던 붓글씨와 먹 냄새가 자연스럽게 그를 끌었고, 대만 유학 시절 장자와 노자를 접하면서 먹은 철학이자 수행으로 자리 잡게 됐다. “먹은 블랙이 아닙니다. 현(玄)의 색입니다. 빛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빛보다 깊은 색이라는 뜻이에요.” 그녀는 수묵화를 단순한 회화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이며, 세상을 관조하는 창이기도 하다.
삶을 건 예술, 붓을 든 수행자
홍푸르메 작가는 매일 새벽 기도 후 작업실에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붓을 놓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서 내게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작업은 수행에 가깝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붓질과 수백 번 덧칠되는 먹의 층위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예술은 타인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심을 다했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처럼, 홍 작가는 매일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해외에서 받은 위로와 응원
홍푸르메 작가는 제네바, 뉴욕, 모스크바, 런던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총 34회의 개인전과 3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특히 2023년 뉴욕 ‘포커스 아트페어’에서는 동양적 고요함과 먹의 강렬함을 담은 작품들로 현지 평단과 관객의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의 한 평론가는 그녀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홍푸르메의 수묵화는 단순한 동양화의 전통을 넘어서, 먹이라는 고유한 재료로 현대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세계와 대화하는 무한한 울림이다.”
또한, '런던 아트페어'에서는 "아시아적 정서와 서구적 현대성의 경계를 무너뜨린 작가"로 소개되며, 젊은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높은 관심을 모았다. 많은 관객이 그녀의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물며 '먹의 숨결'을 느꼈다고 전했다. 특히 '제네바 아트페어'에서 매해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던 한 노부인이 있었다.
그림을 소장할 경제적 여유는 없었지만, 그녀는 매년 아트페어 기간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와 작가의 작품 앞에 조용히 머물렀다.
그림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감동한 홍푸르메 작가는 결국 자신의 작품을 선물했다.
그 순간, 누구보다 기뻐하던 이는 오히려 홍 작가였다. “선물은 제가 받은 거예요.” 그는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은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일어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며 전시장이 하나둘 철수로 썰렁해지던 마지막 날, 기적처럼 컬렉션이 성사됐다. 모두가 좌절을 말하던 그 순간, 작품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예술가로서의 회의와 고비를 넘어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림 앞에서 울어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눈물은 지금도 제 작업의 원동력입니다.”

파지 프로젝트, 버려진 것들의 재탄생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버려진 종이를 모아 새롭게 탄생시키는 ‘파지 프로젝트’를 비롯해, 설치미술과 영상 등 입체적 예술로의 확장을 준비 중이다.
“빛을 받지 못했던 종이들, 조연으로 사라졌던 파편들을 주연으로 세우는 작업이에요. 그들도 빛날 자격이 있거든요.”
그의 작업 방식은 수행에 가깝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작업실에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붓을 듭니다. 그렇게 하루를 채우고 30년을 살았어요. 그게 저만의 여정입니다.”
예술을 꿈꾸는 후학들에게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자신에게 진실했던 시간을 통해 이제 겨우 후학에게 조언할 수 있는 지점에 온 것 같다며, 예술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는 “이 길은 사랑이 없으면 절대 못 갑니다. 하지만 진심이 쌓이면 언젠가 감동하게 돼 있어요. 예술은 누군가를 감동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다했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에요. 과정은 고되고 외로울 수 있지만, 지나고 나면 분명히 ‘참 좋았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홍푸르메, 그 이름처럼 푸르고 단단하게
마지막으로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예술은 결국 내 삶의 흔적이자, 누군가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가 닿는 순간, 예술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홍푸르메. 그 이름처럼 푸르고 단단한 먹의 여백 속에서, 오늘도 그는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붓을 든다. 차와 향, 꽃과 그림이 하나 되는 그의 삶은 예술과 일상이 따로 있지 않다. “차는 정신 음료이고, 향은 감정의 숨결이며, 꽃은 찰나의 미학”이라 말하는 홍푸르메 작가.
그녀에게 예술은 그림뿐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오늘도 그는 조용히 붓을 들고 여백을 남긴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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