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장인은 곧 퇴원한 환자처럼 수염도 깎고 머리도 단정히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는 평소와 다른 언행을 한다고 하는데 바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공허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지 올해로 꼭 40년이야. 이제 틀렸어. 부모를 만나고 친지를 만난다는 것은."
"설령 갈 수 있다 해도 이런 꼴로는 안 되지."
그때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위로했었다.
"수술을 해보세요. 의사 말로는 의외로 좋아질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요."
"내 병은 내가 잘 알지. 악화될 대로 악화돼버렸어."
"우선 마음을 굳게 잡수셔야죠."
"수술해봤자야. 겨우 앉은뱅이나 면하게 해줄 뿐이지. 보나마나 앞으로도 이 병원저 병원에 돈을 갖다 바쳐야 할 것이야"
입원비를 조금도 보태주지 못한 내 형편으로서는 돈 얘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며칠 전에는 마누라하고 이런 얘기를 했지. 내생을 믿어보자고. 그랬더니 되레 나더러 그래보라고 권하지 뭐냐. 그러면서 윤회라는 것을 말하더구먼. 죽는다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거야. 육신만 썩어 없어질 뿐 영혼은 그가 지은 업(業)에 따라 새로 태어나는 누군가의 몸을 찾아간다는 거야. 어쨌든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기분이 좋았지. 이렇게 괴로움을 겪다가 그냥 덧없이 죽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두려웠거든. 그래서 이제는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지."
"아버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모님은 어떡하고요."
"그 사람 걱정은 안 해도 돼. 스스로 내 손을 자기 손에 묶어 같이 죽자고 덤비고도 남을 사람이니께. 내가 외도 좀 할 때 말끝마다 그랬어. 내가 보기 싫다기보다는 좋아서 그랬겠지만. 다른 건 다 변했지만 그 사람 그 마음만은 아직 안 변했어. 아직도 처녀 같지. 나 없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할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장인, 장모의 자살이 잘된 일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지만 그것으로써 그분들의 사랑이 더욱 뜨겁게 느껴져 가슴이 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삶에 비교되는 우리의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살을 맞댈수록 갈등의 골만 깊이 패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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