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면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강헌의 방으로 여자와 동광이 술을 들고 찾아왔다. 동광은 무엇에도 걸림 없는 무애행을 흉내내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강헌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온 이유란 세 사람 모두가 김룡사의 객이라는 동류의식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처사님, 좋은 술이 있어 왔습니다. 중국술이지요."
"고맙습니다."
"이 방에 있는 차로 목을 축인 다음 술을 마시죠. 차향이 술맛을 돋구어주니까요."
강헌은 차를 낮에 여러 잔이나 마셨다고 거절하는 여자에게 아랫목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여자가 어제 약속했던 말을 상기시켜주었다.
"김룡사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 찍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김룡사를 자주 찾는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김룡사, 참 매력적인 절이죠. 볼수록 속 깊은 남자의 매력 같은 것이 느껴지거든요. 선생님도 처음 오신 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느새 여자가 강헌이 녹차를 마시고 나자, 술잔을 권하고 있다. 강헌은 여자의 직업을 부러워하면서 배갈 종류의 술을 훌쩍 털어넣었다.
또다시 여자가 뭐라고 말을 건네려 하자 동광이 가로막는다.
"다 쓸데없는 소리. 번뇌 망상 떠는 소리지 뭡니까. 허튼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요."
그래도 동광이 대단한 술꾼은 아닌 것 같다. 두어 잔에 벌써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객승은 왜 강헌에게 술을 마시라고 성화인가. 술보다는 사람이 그리운 것인가. 이번에는 술잔을 받다가 앞으로 푹 숙이게 되어 승복 너머로 가슴뼈뿐만 아니라 퍼런 문신文身이 보이고 있다. 여자가 없다면 보여 달라고 부탁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는 없다. 얼핏 보아서는 부처의 얼굴을 새긴 문신이다.
술이 몇 잔 더 들어가자 동광의 입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입에 닿는 대로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이었다.
"금선대의 법성스님을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고들 자랑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 멀었어요. 밖으로 안 나오니까 장좌불와長坐不臥니 어쩌니 하고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겁니다. 법성스님을 시봉하는 스님하고 제가 아주 친하거든요. 그런데 장좌불와를 지키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대고 조는 것을 보면 못 봐주겠다 이겁니다. 깨쳤다면 장좌불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곧 청산인데 꼭 금선대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잣거리로 내려가 중생들을 제도해야지요."
강헌은 점점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한 객승의 험담이나 듣기 위해 김룡사에 온 것도 아니고, 그런 소리를 받아들일 만큼 편안한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법성선사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광의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습성대로 방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김룡사의 스님들이 그래도 속가의 아버지인데 하고 강헌의 태도에 대해 실망하지 모르지만 부자의 혈연관계를 법성선사가 먼저 끊어버리지 않았던가. 강헌의 반응은 선사의 그런 태도에 대한 대꾸이자 메아리였다.
"스님은 출가 전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저요."
그러나 동광은 서슴없이 말했다.
"운동권 학생이었지요. 덕분에 졸업도 못하고 출가를 했습니다."
여자도 물었다.
"어느 절에 계셨어요?"
"절이라 할 것 있나요. 선방에만 15년 정도 돌아다녔으니까."
"김룡사에는 오래 계실 생각입니까?"
"아니오. 지리산 토굴로 갈 겁니다. 한 3년 주저앉아 참선공부 할 만한 곳을 찾는데 친구 스님한테서 오늘 내일 연락이 올 겁니다. 그래도 공부가 안 돼 깨치지 못하면 미련 없이 떠나야지요."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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