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연기를 계속 했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죠. 지금도 극작가와 연출로 현업 활동을 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아이디어를 구하러 오니 능히 만족스럽습니다."
'국민배우' 최민식과 극단 동기였던 시절을 회상하던 이대영 교수에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대배우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예술 곁에서 묵묵히 걸어온 지난 세월은 가치 있었다. 희곡 작가로, 공연 연출가로, 문화 정책가로,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수로, 40여년 간 부지런히 발자취를 남겼다.
당장 2024년 10월에도 명함이 여러개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공연영상학과 교수이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한국예술문화정책연구원 원장 직함도 갖고 있다.지난 7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초연되는 '사직제례악'의 연출을 맡았고, 지난 27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막내린 연극 '우정만리'의 작가다.
이대영 교수는 내년이면 등단 40주년을 맞는다. 대학 재학 시절이던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희곡이 당선되며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29세의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와 신춘문예 동기다. 그는 "당선 후 중앙일보에 들어갔는데 당시 기자였던 기형도가 저에게 살짝 와서 귓속말로 '나는 동아일보 시당선 됐다'고 하더라"고 과거를 떠올렸다.
연기에도 자질이 있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 연기에 먼저 발을 들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차범석 대표의 극단 산하의 연극 단원이 됐다. 이 교수는 "대학교 1학년 때 '크리스티나 여왕' 주연을 맡게 됐는데 연기가 꽤나 재미있었다. 연극반에 들어가서 뮤지컬도 두 세편 하고 연기도 제법 많이 했다"고 말했다.
1984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공모한 '에쿠우스'의 남자 주인공 앨런 오디션에도 응모했다. 당시 함께 발탁됐던 배우가 최민식이었다. 당시 실험극장은 윤석화, 윤호진 등이 소속된, 명성있던 극단이었다.
"앨런 역에 선발되서 실험극장으로 출퇴근 했어요. 선배들과 물걸레질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나요. 신춘에 당선되자 '우리 극단에도 극작가가 생겼다. 배우는 너 아니고도 많다'고 했어요. 사실 그 땐 제가 최민식보다 앨런 역에 어울린다 생각했어요(웃음). 말을 하는 형들에게 업혀야 했는데, 최민식은 덩치가 있었고 저는 호리호리 했거든요. 그러다 최민식이 먼저 군대를 갔고, '앨런 역은 내건가' 했는데 저도 졸업을 하고 입대영장을 받았죠. 그러니까 1대 강태기, 2대 송승환, 그리고 우리 대신에 최재성 배우가 3대 앨런을 했죠.
이 교수는 "만약 그 때 앨런을 했다고 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최민식처럼 훌륭한 배우가 됐을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고 웃었다.
최민식이 '국민배우'의 길을 걷는 동안, 이대영 교수는 문학과 방송, 연극, 게임, 그리고 정책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계 전방위에서 활약했다.
"제대 후엔 KBS 드라마 작가가 됐어요. 희곡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거든요. 드라마 하면서 연극도 했고, 그 뒤엔 대기업 홍보팀에도 근무했고, 게임도 만들었어요. 극단을 만들어 창작 공연도 했는데 어려움에 처해 포기했죠."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무대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글을 썼고, 그게 안되면 최소한 관객으로라도 무대를 마주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에서 연극의 역할 놀이, '인간 관계학'을 떠올렸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고, 개개인 모두가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니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예술인들의 삶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문화 정책과 산업 전반으로 향했다.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정책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등 문화 정책 전문가로 활약했다. 건군 65주년 국군의날 행사(2013),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2015) 등 굵직한 행사 감독도맡았다.
그의 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미투 사건으로 폐쇄된 밀양연극촌의 부활이다. 그는 2018년 밀양연극촌 아카데미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2년 간 연극촌을 되살리는데 공을 들였다.
"2011년도에 학교에 복귀해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가 됐어요. 작품을 쓰는 것보다 작가나 연출가를 키우는데 바빴던 시기였어요. 불미스러운 일로 밀양연극촌이 문을 닫았는데, 그것을 살리기 위해 밀양으로 갔어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거든요. 월화수는 서울에서 수업을 하고 목금토요일은 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내려갔어요. 그렇게 밀양연극촌을 살렸고, 이전보다 더 잘되게 했죠. '만만한 인생'과 '우리집 식구들 나만 빼고 다 이상해' 작품들도 다 그 시기에 탄생했어요."
꾸준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하며 쉼없이 관객과 교감했다. 숱한 작품들 속에서도 올해 7월 국립국악원에서 초연한 '사직제례악'은 그가 인생에서 꼽을 만한 의미있는 작품이다.
'사직제례악'은 조선시대 땅과 곡식을 모시는 사직대제에 쓰인 음악과 노래, 무용이다. 역대 왕들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제례가 왕가를 위한 제례였다면, 사직 제례는 민중을 위한 제사다.
"옛날에는 종묘제례가 더 웅장했겠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사직제례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사직제례약'은 사직 제례를 복원한 작품이에요. 10년 전에 국립국악원이 제례악을 복원했는데, 극장에서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국민, 민중의 안녕을 위한 제사를 국립국악원 극장에서 지냈다는 것에 있어서, 제 연출 역사에 남을 작품 같아요."
'사직제례약' 연출이 끝나자마자 그가 쓴 연극 '우정만리'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우정만리'는 근현대사 폭풍 속 대한민국 100년을 헤쳐나간 우편집배원 3代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3부작으로 기획된 '우정만리'의 첫 번째 이야기인 이번 공연은, 초기의 우편배달부인 벙거지꾼 '김계동'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극은 대를 이어 체신국 관리자가 된 계동의 아들 '수혁'과 우편집배원이 된 계동의 손녀 '혜주'의 시선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100여 년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간다.
작가 이대영은 "연극 '우정만리'는 백여 년 전 일제치하를 살아온 집배원 3대 가족의 이야기"라며 "아주 평범한 한 가정의 삶을 통해 사랑과 결혼, 독립운동과 해방, 6·25 전쟁에 따른 동족상잔의 비극, 종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접한 이들의 이야기를 글에 녹여 넣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요즘 한국문학이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잖아요. 연극, 희곡도 문학의 한 분야로서, 많은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아 마음의 자양분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등단 40년의 이 교수의 열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그는 당면한 문화 산업의 과제들을 죽 늘어놓았다. '한류문명의 발화'와 관련된 논문을 쓰기도 한 이 교수는 "한류 문명을 위한 조건들이 있다. 그것을 뒷받침 하기 위한 법과 제도,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K컬처의 핵심에 극문학박물관은 없다"며 극문학 박물관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한류문명이 안착이 아니라 발화되어야 하는 시기에요. 한류문명을 발화시킬 절호의 기회에, 그 발화자 역할을 10년, 20년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는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욕심이 있고, 정책가로서는 콘텐츠를 담아낼 스토리텔링 공간을 어떻게 구축할지, 또 법과 제도의 구축 등 몇가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어요. 후학도 키웠으니 어드바이저 역할도 해야죠. '다 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사도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남이 봐주던 안 봐주던 모노 드라마를 써서 연기도 하고 싶어요(웃음). 각 분야별로 완성 못한 일도 많고, 완성 되어가고 있는 일들도 있는데 조금씩 마무리 해가고 싶습니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