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강헌은 문을 열고 나와 대웅전으로 걸어갔다. 대웅전 좌측에는 기둥의 크기가 각기 다른 설선당說禪堂이, 우측에는 해운암海雲庵이 자리 잡고 있다. 말 그대로 설선당은 법회를 보는 강당이고, 해운암은 대중들이 식사를 하는 공양각인 모양이다.
아, 이제 기억이 난다. 성화대 같은 저 두 개의 돌기둥인 노줏대에 관솔불을 켜놓고 대웅전 뜨락을 환하게 밝히곤 했었지. 그때는 이 김룡사에도 전등불이 없을 때였으니까.
관솔불이 활활 타오르면 어머니뿐만 아니라 스님과 보살들이 대웅전으로 들어가시곤 했지. 그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따라 들어가곤 했고. 그때는 대웅전 안의 분위기가 무서웠었다. 높은 천장에는 나무로 만든 두 마리의 극락조極樂鳥가 매달려 있고, 한쪽 벽 밑에는 떡과 과일들 가운데 자살한 마을 처녀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십여 년 전, 어머니 49재 때도 그 자리에 노모의 사진과 문경지방에서 나는 탐스런 과일들이 놓여 있었고.
이제 노줏대는 사용되지 않는지 화강암의 돌빛이 깨끗하다. 관솔불 그을림이 세월의 빗물에 씻기고 바래져서 없다. 작은 탑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맞아. 기억이 나는군. 김룡사는 탑이 대웅전 앞에 있지 않고, 특이하게도 응진전應眞殿 뒤 산 속에 숨어 있었지. 돌부처님은 건너편 노송들 그늘 속에 서 있었고.
강헌은 그대로 선 채 누군가가 불을 붙여놓은 향과 미소 짓는 부처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부처님께 시도 때도 없이 절을 한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나 눈을 감고 기다려보지만 부처님도,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디선가 조용히 웃고 계실 것만 같은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고요할 뿐이다.
법당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감은 눈꺼풀 속으로 적막이 안개처럼 스며드는 느낌이다. 법당 안을 여러 장엄물로 장식하고 있지만 김룡사 특유의 푸른 적막만은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혼이 푸른 적막으로 윤회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마자 강헌은 눈물이 났다. 눈 녹듯 스르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오십 줄에 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청승맞기도 하지만 별수없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강헌은 눈을 뜨고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소리없이 허어 웃고 만다. 아, 극락조는 아직도 대웅전 천장에 매달려 있구나.
향이 반쯤 타들어가고 있을 때쯤 강헌은 일어서버렸다. 마침, 대웅전 밖에서는 운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사님, 절에서는 북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공양을 굶지 않거든요."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니 공양각인 해운암으로 여태 보지 못했던 몇몇 스님들이 모여들고 있다.
"뭐 필요하신 것 있으면 저를 찾으세요. 주지스님이 처사님의 편의를 봐드리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해운암을 들어서자, 운곡이 먼저 와 상 앞에 앉아 있는 스님들을 소개해주었다.
"이 손님은 서울에서 내려오신 강 사장님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재무스님이고, 저 분은 우리 절의 범종을 맡아 치시는 노스님입니다. 또 이분은 객客스님인데 임시로 새벽 도량석을 하시는 동광東光스님이구요."
운수납자雲水衲子인 노스님의 법명은 밝히지 않는 것이 선가의 풍속인 모양이었다. 노스님의 머리는 삭발할 기회를 놓친 듯 서리가 덮인 것처럼 하얗다. 또한 인사가 끝나자마자 재무스님은 반찬이 시원찮다며 큰 소리로 늙은 공양주 보살을 닦달하고 있다. 그것 또한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라면 공양주 보살에게는 미안하지만 남의 눈치 보지 않는 순수한 태도이다.
여자는 겸연쩍어하는 공양주 보살과 겸상을 하면서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오고 있다. 그리고 노스님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양을 한다. 재무스님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공양주 보살을 힐끗 보며 헛기침을 하고 있고.
가장 맛있게 송이버섯국을 먹는 스님은 객스님인 동광이다. 동광은 데친 호박잎에 따뜻한 밥을 얹어 된장국을 소스처럼 조금씩 뿌려 싸먹는 솜씨가 능숙하다. 몸이 너무 말라 승복 너머로 가끔 가슴뼈가 드러나기도 하여 안쓰러운데, 출가 전에는 주먹깨나 쓴 싸움꾼이었는지 이는 몽땅 의치이다.
절이라고 해서 신선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닐 것이다. 자세히 보면 세속의 사람들과 같이 무게가 각기 다른 고민이 스님들의 얼굴에 외로움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고, 출가 전의 습習이 이끼 자국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