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월적이 눈을 떴다. 눈을 감고도 다 지켜보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성스님, 가까이 오시게. 너희들도 듣거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흘 뒤에 나는 갈 것이다."
"큰스님, 안됩니다."
상좌 법일이 만류했다. 이내 법일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러나 월적의 말투는 차분하고 완고했다.
"슬퍼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이별한다. 부처님 말씀이니라."
"사숙님, 듣고 있습니다."
"법일아, 나를 다비장으로 운구하지 말고 화장장으로 보내거라."
"다른 큰스님들은 모두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모인 가운데 다비장에서 여법하게 가셨습니다. 저는 상좌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너는 상좌로서 도리를 이미 다했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굳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지 마라. 다비장으로 나를 보내 공연히 생나무 생가지를 베지 마라. 화장장에서 지체하지 말고 빠르게 태워 재가 나오거든 낙동강에 뿌려다오."
우멸도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큰스님, 다비식은 누구나 자신이 공(空)임을 알게 하는 무상법문입니다. 그러니 법일스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월적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한두 마디 중얼거렸다.
'나는 은사님이 지어준 내 이름대로 살아 왔다. 월적(月跡), 달의 흔적이 어디 있더냐. 흔적 없이 뜨고 지는 것이 달이 아니더냐.'
그래도 법일이 애원하듯 월적의 손을 잡자 뿌리치며 조금 큰소리로 꾸짖었다.
"법일아, 나마저 시체장사를 하란 말이냐!"
월적의 '시체장사!'란 말에 법성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불벼락 같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우멸은 다비장의 불길이 무상법문이라고 말했지만 월적은 미화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꾸짖었다. 월적의 꾸지람에 세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월적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반인들 시신이 가는 화장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월적은 유언대로 사흘 뒤에 입적했고, 법구는 부산 당감동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법성, 법일, 우멸 등이 화장장으로 가서 유골함을 들고 나왔다. 월적의 원대로 낙동강에 재를 뿌렸다. 마침 흙탕물이었던 낙동강 강물은 쪽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퍼붓곤 했던 비가 사흘 동안 내리지 않은 데다 햇살이 쏟아져 양명했기 때문이었다.
우멸은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시체장사'란 말에 걸렸다. 벼락같은 일갈이 가시처럼 박혔던 것이다. 사부대중이 모여 영결식을 하고 다비식을 치르는 것이 월적의 일갈처럼 정말로 '시체장사'인 것인가!
그러나 우멸은 몇 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지리산 비로암 산중생활이 각박하고 법성과 함께 하는 참선수행이 힘들어서였다. 하루 공양은 일식만 했다. 예불과 공양, 울력시간을 빼고 남은 시간은 대부분 텃밭의 반석으로 나가 가부좌를 틀었다. 눈보라치고 비바람이 거센 날은 툇마루로 올라와 화두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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