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스 바르다는 2시간 동안 클레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재 진행형으로 뒤쫓는다. 자연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영화적 시간 속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세련된 미장센으로 죽음을 통보받기 직전의 클레오를 스토킹한다.
왕가위의 <2046>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은 조악한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영화 속에 등장한 미래 도시의 시간은 해체돼 과거와 현재의 경계조차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고 모호하게 만드는 영화가 어디 <2046> 뿐일까. “내가 네 친구로 보이니?”라고 묻는 호러 아이콘들처럼 “이 시간이 과연 네가 알고 있는 그 시간일까?”라고 묻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다.
최근 개봉된 <나비효과>나 <롤라 런> <카라> 등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되돌리며 시간의 일회성을 무너뜨린다.
<동감><시월애><프리퀀시>는 단절된 시간들의 연결통로를 보여 주며, <인어공주>는 과거의 ‘어머니’와 현재의 ‘나’… 공존하는 괴상한 시공간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이런 특이한 소재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영화에 사용되는 ‘플래시백’이라는 장치는 어느 때나 과거로 이동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이렇게 과하거나 덜한 차이가 있을 뿐 대개의 영화들에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재구성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이처럼 열린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는 스크린 속 시간과 현실적 시간이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기도 한다.
아네스 바르다의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는 김기덕의 <실제상황>이나 TV시리즈 <24>의 원조 격이다. 의사의 통보를 기다리는 한 여가수의 불안한 2시간을 현재 진행형으로 추적하고 있다.
파리 리볼리 거리에서 몽수리 공원을 거쳐 살페트리에 병원에 이르는 2시간 동안, 세상에 대한 원망과 히스테리로 가득했던 여자는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정체성을 회복한다.
17:05 ~ 17:08 제 1장 클레오 : 타로점집, 거리
갈색 톤이 진하게 배어 있는 탁자 위에서 카드는 하나씩 뒤집어 진다. 타로 카드와 패를 돌리는 집시 여인의 손은 컬러지만, 클레오의 얼굴이 잡히는 순간 모든 사물은 생기를 잃은 흑백으로 바뀐다.
나쁜 점괘에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클레오는 문의 양쪽에 걸린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클레오의 모습이 앞뒤로 반사돼 끝도 없는 피사체를 만들어 낸다.
거울은 타로카드처럼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운명을 결정하는 카드 안에 클레오 자신이 들어 있는 듯한 구도가 된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감상적인 독백을 하는 콜린 마르잔의 표정은 압권이다.
이전의 비참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도도하고 거만한 표정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햇빛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간다. 타이틀롤과 함께 등장하는 타로 점에서 이어지는 3분간의 장면이다.

17:38 ~ 17:45 제 7장 클레오 : 집, 거리, 카페
아네스 바르다 영화에서 미장센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감독이 구분지은 제7장은 약 7분간이며 가장 극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작곡가가 가져온 죽음에 관한 노래를 부르던 클레오는 과장되게 부풀린 가발을 벗고 계절에 맞지 않은 털모자와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선다.
집 앞에는 서너 살 된 아이가 장난감 풍금을 치고 있는데, 클레오가 모퉁이를 돌자 무심한 풍금 소리는 고독한 클레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기막힌 배경음악으로 연결된다.
중국 음식점의 거울 앞에 선 클레오는 마지막 허위를 드러내는 매개체였던 털모자까지 벗어버리고, “결국 나 자신을 아는 건 나뿐”이라고 독백한다.

18:15~ 18:30 제 13장 클레오, 앙트완 : 몽수리 공원, 버스, 살페트리에 병원
흑백 영화의 매력은 색체가 선사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음영과 빛의 조화에 있다. 이 장은 아네스 바르다가 구분지은 마지막 장으로 버스에서 바라보는 파리 시내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명백히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한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불과하지만, 초초와 불안에 떨었던 5시의 클레오는 리볼리 거리에서 살페트리에 병원에 닿는 여정 동안 삶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는 7시 클레오의 모습은 편안하다. 화학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는 말을 듣지만, 클레오는 오히려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한다.
사진작가 출신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아네스 바르다는 컬러 필름이 표현할 수 없는 흑백필름의 담백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클레오 생의 가장 긴 2시간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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