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뮤지컬 무대에선 잔뼈가 굵은 인기 배우지만,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박지연의 모습은 아직 낯설 법하다. tvN '오 나의 귀신님'과 KBS 1TV '안단테', KBS 2TV '매드독' 등을 통해 드라마 작업을 경험했지만 박지연 자신에게도 아직 드라마 현장은 매번 새롭고 설렌다.
종영한 JTBC 드라마 '라이프' 역시 그랬다. 대학병원과 기업 재단 간 갈등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박지연은 응급실 치프 이소정 역을 맡아 시청자를 만났다. 출연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그의 등장을 기억할 수 있는 이유들은 많다. 긴 머리카락을 구불거리게 만든 퍼머 헤어가 소정 역을 설명할 첫 번째 단서일 법하다.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매일 밤 아수라장인 응급실을 지키는 똑 부러지는 치프 이소정의 모습은 '라이프' 시청자들의 뇌리에 충분히 남을 만한 이미지였다. 낯선 인상과는 선뜻 매치되지 않는 탄탄한 발성과 연기력은 두 번째 힌트다. 짧은 대사, 작은 표정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꽉 찬 연기는 지난 2010년 데뷔 이후 뮤지컬 무대에서 갈고 닦은 기본기다.
반 사전제작으로 촬영된 '라이프'는 종영 시점을 여유롭게 남겨두고 작업을 마쳤다. 박지연 역시 촬영을 모두 마무리한 후 휴식을 취했고 차기작 뮤지컬 연습에 매진 중이다. 드라마가 유의미한 메시지를 남기며 호평을 받은데다 짧은 여가도 즐겼으니 박지연으로선 더없이 차분한 나날들이었다. 곧 올라설 무대를 떠올리면서는 기대감과 즐거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박지연을 만나 첫 의사 역을 소화하기 위해 기울였던 상상 이상의 노력부터 연기에 임하는 자신만의 태도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연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더없이 진지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은 조금이라도 가벼운 화제가 등장할 때면 단번에 숨겨둔 장난기로 물들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 뜨겁고도 유쾌한 에너지에 반해버렸다.
"응급환자 수술 장면은 아주 잠깐 나오지만,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다섯 시간을 찍었어요. 조금밖에 나오지 않아 아쉽기도 하지만 배우로서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촬영 전 실제 병원에서 더미(인체 모형)를 통해 살을 꿰매는 것부터 기도 삽관까지 많은 동작을 하나 하나 다 배웠거든요. 현장엔 늘 의사 선생님이 계셨고, 작은 것까지 디테일하게 지도해주셨어요. 상황에 어울리는 현실적인 대사들을 많이 자문해주셨죠. 그래서 '라이프' 촬영 후 헤어질 때 아쉬웠어요. 모두 한 팀처럼 열심히 임했으니까요."
'라이프'는 완성도 높은 데뷔작 tvN '비밀의 숲'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수연 작가의 두 번째 드라마였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은 박지연이 '라이프'의 오디션에 뛰어든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소정 역이 애초 크게 명시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잠깐 등장하는 캐릭터에도 모두 살아있는 존재감을 부여한 '라이프' 속에서 박지연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캐릭터들의 성격을 잘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감사하게도 '잘 봤다'는 반응을 많이 들었고요. 완성본은 대본보다 더 입체적으로 나온 것 같아요. 결국 '라이프'는 작은 사건들이 모여서 그리는 그림을 비추는 드라마였잖아요. 어쩌면 병원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결국 다 사람이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고요.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 사람이었구나'라고 이해하는 과정이 좋았어요."
배우이기 전에 사회의 구성원, 언제든 의료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환자이자 소비자로서 느낀 감흥도 적지 않았다. 관심은 있지만 쉽게 알 수 없었던 병원 사회의 속살을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박지연은 "'라이프'를 통해 이 삶 안에서 소비자로서 나의 인식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작품을 잘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중요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어 "병원의 인물들은 각자 역할이 있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을 떠올리게 한다"며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의사로서 소신을 지켜야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것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그 상황 속 부딪힘을 '라이프'를 통해 느끼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답했다.
조승우, 이동욱, 김원해 등 '라이프'를 통해 함께 호흡을 맞췄던 선배 배우들과의 경험 역시 박지연에게 든든한 자산이 됐다. 함께 세트를 지킨 단역 배우들의 연기까지 출중해 현장에서 배울 것 뿐이었다는 것이 박지연의 이야기다. 그는 "조승우 선배의 연기에는 늘 놀랐지만 이번에도 깜짝 놀랐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동욱 선배의 경우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도 현장을 늘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지켰다"고 돌이켰다.
드라마 작업을 통해 활동 반경을 넓혀 온 박지연이지만 무대에 대한 애정은 매 순간 남다르다. 연극, 뮤지컬계에서 방송으로 넘어와 연기를 펼치고 있는 선배들을 향해선 "길을 잘 닦아주셔서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공연계에서 출발한 선배들이 드라마에서도 잘 해내셨기 때문에, 저에게도 좋은 기대가 생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카메라 안에서 못지 않게 무대 위에서 느끼는 것도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역을 넓혀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분들이 대단하고 멋지게 느껴져요. 드라마를 할 땐 공연을 통해선 알 수 없었던 연기 기술을 배울 수 있어 좋고, 공연을 하는 선배들을 볼 때는 무대 위를 자유롭게 누비는 연기 역시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죠."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박지연의 얼굴이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뱉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레미제라블' '맘마미아' 등 유명 라이선스 뮤지컬 무대에서 팬들을 끌어모은 그지만 드라마에서, 연극에서, 뮤지컬에서 보여주는 얼굴들은 매번 다르고 낯설다. 단아하고 수수한 분위기가 마냥 편한 인상을 완성하다가도, 머리를 다르게 묶거나 고갯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과장을 조금 더해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무대에서, 또 다른 매체에서 보여줄 다른 얼굴들이 크게 궁금해진 순간이었다.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여러 이미지가 있다는 건 배우로서 장점이겠죠?(웃음) 저 자신은 조금 수동적인 성격의 인물이지만 그 안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요. 무언가를 꼭 이루겠다는 강한 성취욕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 때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는 것이 좋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연기할 것 같고요"
박지연은 오는 11월 개막하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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