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기사의 본문에는 영화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의 결말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어느 사견이 영화의 완성 과정을 설명할 때 쓰인다면, 이미 개봉해 관객을 만난 작품을 말하기 위해선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한 영화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더이상 감독의 역할이 아니다. 그 주체는 영화 안에 뭉쳐둔 은유적 설정들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많은 감독들이 내놓는 답, 바로 관객이다.
여기, '해석은 관객에게 맡기고 싶다'는 감독들의 익숙한 바람을 몸소 실행 중인 이들이 있다. 지난 2017년 5월 개봉한 영화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 제작 CJ 엔터테인먼트, 폴룩스(주)바른손, 이하 불한당)의 관객들이다. '불한당원'으로 불리는 이 관객들이 지난 300여일 간 보여 준 행보는 과연 손익계산서가 영화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유일한 척도일 수 있는지 묻게 한다.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 극장에서, 그리고 IPTV·VOD·DVD 등을 통해 적어도 수십 번씩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은 온라인 공간에 영화를 만든 감독과 출연한 배우들 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든 다양한 해석들을 내놨다. 인물의 작은 행동과 눈빛, 의상은 물론이고 조명의 변화, 상처입은 신체의 부위, 인물이 누운 벤치의 색상, 계절을 앞서간 곤충의 울음소리까지, 영화 속 모든 순간들이 시처럼 독해됐다. 하나의 창작물이 무려 1년 간 쉼 없이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영화가 지닌 문학성과 미술성이 2차 창작을 통해 최대치로 발현됐다. '인기'라는 단편적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다.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변성현 감독의 관객과의 대화(GV) 행사에서도 이런 순간들이 이어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이뤄진 이날 GV는 '동시상영전:한국과 독일의 작가주의 영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변성현 감독이 '불한당' 공식 상영 종료 후 참석한 두 번째 GV였다. 첫 번째 행사 역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바 있다. 지난 2월10일 열린 시네마테크KOFA가 주목한 2017 한국영화 프로그램의 관객과의 대화는 변성현 감독이 지난 2017년 5월 영화 개봉에 앞서 참석했던 홍보 일정 이후 최초로 단독으로 참석한 공식 행사였다.
개봉 시기 논란이 됐던 SNS 발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일부 오해에 대해 해명도 했지만, 당시 감독은 칸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대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온 관객들에게 2월10일의 행사는 공식 상영 종료 후 감독으로부터 직접 영화에 대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첫 기회였던 셈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다양한 상영 프로그램을 통해 고전 영화, 작가주의 영화는 물론 공식 상영 당시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수작들을 다시 한 번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해 왔다. 유명 배우가 게스트로 참석하는 GV 상영이나 다시 보기 쉽지 않은 명작들이 상영되는 프로그램이 열릴 때면 예매 경쟁이 치열하지만, 감독만이 참석하는 행사에 관객들이 열띤 예매 경쟁을 펼치는 프로그램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지난 2월 첫 GV를 앞두고는 온라인 예매에 실패한 관객들이 현장판매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영상자료원을 지켰다. 지난 18일 열린 두 번째 GV를 앞두고도 오전부터 줄을 선 관객들이 로비를 꽉 채우고 있었다. 영상자료원은 조이뉴스24에 "온라인 예매는 오픈하자마자 모두 매진됐다"고 알렸다.
아마 '불한당'을 한 번만 본 관객들에겐 이날 열린 두 번째 GV를 채운 질문과 답변들은 '난이도 최상'에 해당하는 내용들이었을 법하다. 영화를 만든 감독조차 긴장하게 하는 질문들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역시 "변 감독이 관객들의 예리한 질문이 무섭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고 말했을 정도다.
한 관객은 극 중의 서로 다른 날짜에 인물들이 같은 옷을 입었다는 내용을 언급하며 두 시점에 대한 질문을 해 "예리하시다. 그건 실수가 맞다"는 감독의 감탄어린 답을 이끌어냈다. 흔들리는 카메라워크가 재호(설경구 분)와 현수(임시완 분) 중 누구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인지에 답하며 감독은 "첫 번째(재호의 시선)로 생각하고 찍었는데 두 번째 해석(현수의 시선)이 더 좋은 것 같다. 다음에 인터뷰를 할 일이 있다면 훔쳐 쓰겠다"고 재치있게 답했다.
출소한 현수가 지내는 생활 공간이 한 신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그간 현수가 어디에서 지냈는지 묻는 질문에는 "원래 시나리오에는 재호가 묵는 호텔이 있어 그 곳에서 같이 지내는 걸로 생각했다. 더블베드다"라고 답해 관객들로 하여금 두 인물 간 관계를 한 번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날 변성현 감독은 '불한당원'들이 제작하고 공동으로 구매했던 점퍼를 입고 등장했다. 등 부분에 '불한당'이 한자로 적힌 점퍼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는 관객들이 선물한 것이 아닌, 감독이 직접 구매하려다 실패해 동료가 대신 주문해 준 옷이다.
영화를 완성한 이는 감독이지만, 이후의 영화는 온전히 관객의 것이 된다. 매력적인 창작물은 텍스트로, 그림으로, 또 다른 사물로, 끝없이 재창작된다. 감독의 영화에 감화된 관객이 만든 옷을, 감독이 구해 입는다. 감독이 관객의 2차 창작을 자신의 연출 의도보다 더 마음에 들어 한다. 그리고 이들의 지난 1년을 담는 다큐멘터리 역시 '불한당원'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창작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이다. 영화와 관객의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흥미로운 공전이다.
이하 '불한당' 변성현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허남웅 영화평론가(이하 허) : 감독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 팬들이 많으니, 진행은 하겠지만 관객의 질문을 많이 받겠다.
변성현 감독(이하 변) : 연출을 맡은 변성현이다.
허 : 어떻게 지냈나?
변 : 요즘은 집에서 시나리오 쓰고, 술 먹고, 그러고 있다. 잘 지내고 있다.
허 : 한 마디 할 때마다 관객들의 분위기가 굉장히 좋다. 당원들에 대해선 보도가 많이 나와 힘이 돼주고 있는데, 감독의 입장에서 남다를 것 같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라졌나?
변 : 일단 저는 ('불한당원'들의 존재를) 조금 늦게, 배우·스태프들보다 늦게 알았다. 너무 고맙고, 아까 뒤에서 (허 평론가와) 같이 같이 이야기했었는데, ('불한당'이) 끝나고 '영화를 하지 말까?'하는 생각도 오랫동안 했는데 많이 힘이 됐다. '다시 뭔가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해 줬던 것 같다.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변한 것 같진 않은데, 굉장히 잘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더 노력하고 성의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허 : 전작인 '나의 PS 파트너'와 '청춘그루브'는 '불한당'과 다른 종류의 작품들이었다. 이야기가 생각나면 그에 장르를 맞추는 편인가, 아니면 작업 방식이 그 반대인가?
변 : 장르를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PS 파트너'는 초고에선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었다. 파국을 맞는 사랑 이야기였는데, 연출할 생각으로 쓴 건 아니고 공모전을 위해 썼다. '로맨틱 코미디로 해 보자'고 생각해 만들었다. 로맨틱 코미디를 하다 보니 느와르 장르가 굉장히 하고 싶었다. 장르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다.
허 : 느와르를 하겠다고 생각한 뒤엔 이야기를 어떻게 떠올렸나?
변 : 느와르를 하려고 소재를 찾고 있었는데, 언더커버 영화가 많지 않나. 너무 대표적으로 '무간도'라는 훌륭한 영화가 있었고, '도니 브래스코'라는 훌륭한 영화가 있었다. '신세계'가 나왔고, 그 이후 '불한당'을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 줬을 때 우려가 많았다. '짝퉁' 영화처럼 느껴질까봐. (하지만) 오히려 '신세계'를 보고 ('불한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더커버를 하네?' 싶었다. 다르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그렇게 소재를 찾았다. '여기서 어떻게 비틀수 있을까' 생각하다 멜로 감정을 더 넣고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언더커버'로 가보자고 생각해 쓰게 됐다.
허 : '불한당'은 고백, 감정이 중요한 작품이다. '나의 PS 파트너' 당시 (인터뷰를) 보니 멜로 감정을 확신하기 힘들어 주변에 많이 물어봤다고 하더라. 그 영화의 경험이 '불한당'을 만드는 데 있어 도움이 됐나?
변 : '나의 PS 파트너' 때는 멜로의 부분이 힘든 게 아니라 배우 지성과 김아중의 알콩달콩함을 연출하면서 내가 '오그라들었던' 거였다. 내가 시켜놓고.(웃음) 둘이 상황을 만들면 '컷' 하고 이게 진짜 귀여운 게 맞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식이었다. 딱 캐치를 못하겠더라. 알콩달콩한 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면에 있어 주변 여성 스태프들과 스크립터였던 주영 씨라는 친구에게 이게 사랑스러운 장면이 맞는지 물어봤었다. '불한당'에서도 비슷했다. 현수가 초반에 사랑스러워야 했다. 아이같은 모습을 보일 때, 내가 주문해놓고 '지금 저게 귀엽고 사랑스럽죠?'라고 여성들에게 많이 물어봤다.
허 : 이 영화의 주요 콘셉트는 배신인데 기존 언더커버와는 다른 이야기 구조가 있다.배신의 이미지가 있는데, 임시완과 설경구 모두 (배역과)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두 배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변 : (설)경구 선배는 워낙 베테랑이고, 내가 어릴 때 처음 영화를 시작하며 우상으로 삼았던 배우들 중 톱 리스트에 있던 분이었다. 뭘 해도 잘 할 것 같은데, 한 번도 멋있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더라. 물론 약간은 있겠지만 영화적으로 과하게 폼 잡으면서 한 게 없던 것 같아 그런 부탁을 드렸다.
임시완 씨의 경우, 제가 TV를 진짜 잘 안 보는데, tvN 드라마 '미생'을 술 먹다가도 '본방사수' 하러 들어갔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 사실 아이돌 가수인 줄도 몰랐다. 저 배우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예쁘다보니 '남성스러움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임시완을 만나 이야기하다보면 굉장히 남자답고 어른스럽다.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임시완이 캐릭터를) 굉장히 무겁게 잡았다. 느와르를 준비한다고 하니 굉장히 무겁게 잡아 와 내 앞에서 리딩을 했었다. 출소 장면부터 무척 무거웠고 언더커버로 들어갈 때도 심각하게 가길래 '정말 애처럼 갔으면 좋겠다. 현수의 입장에선 현수의 성장처럼, 소년이 남자가 되는 성장처럼 보여야 한다'고 했더니, 워낙 영리해 금방 알아듣고 하더라.
허 : 극 중 현수의 남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따귀 때리기 대회 신이 있는데, 이 설정을 택한 이유는?
변 : 재밌는 게 뭐 있을까 하다 유튜브에서 봤던 것을 떠올렸다. 교도소는 아니었는데 외국에 따귀 때리는 대회가 있더라. '이것을 한 번 넣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주변에선 초반에 '너무 쌩뚱맞다'고 반대했다. 재밌을 것 같았다. 거기서 현수 역이 굉장히 남성스러워 보이길 원하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고 재치 넘치는 모습이길 바랐다. (현수는) 엄마의 죽음 이후 남성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형, 나 경찰이야'라고 고백한 이후에 남성성이 발현되길 바랐다. 오히려 그 부분(따귀 때리는 장면)은, 액션 장면도 그랬지만, 재기발랄하고 귀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호가 그런 현수를 보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장면이었다.
허 : 설경구는 머리카락을 모두 올리는 등 변신을 시도했다. 보기에 어땠는지, 현장 분위기도 궁금하다.
변 : 설경구 선배에게 연기 디렉션을 드리는 것보다 옷 입히고 머리 올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웃음) '안 한다'고, '절대 머리도 안 올리고 수트는 두 번 정도 입겠다'고 하셨었다. 촬영 중간에도 계속 그랬다. 엔딩 찍으러 가는데 그 때도 수트를 안 입는다고 했었다. '마지막 감정이 수트 감정이 맞냐'고 묻기에 '수트 감정이 맞다. 수트 감정은 아니더라도 수트 '간지'여야 된다'고 했다. 사실 그 때 잠바를 구해다 달라고 하셔서 잠바를 구해왔었다. 제가 '잠바 입고 후줄근하게 죽고 싶냐'고, '좀 깔끔하게, 재호는 재호답게 멋있게 죽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나중에는 수트를 입겠다고 하시더라.
처음에는 굉장히 쑥스러워하셨다. 수트를 입고 허리를 이렇게 못 펴고 계속 (수그리고). 스태프들에게 제가 시켰다. 옆에서 계속 '멋있다'고 하자고. '선배님, 오늘 진짜 멋있어요'라고 계속 했더니 어느 순간 서서히 자신감이 붙더라. 다리도 꼬시고. 원래 조금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시는데 걸을 때마다 '더 펴달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런 이야기를 안 해도 너무 멋있게 하시더라. 교도소 신을 찍을 때도, '교도소에선 머리를 다 내리고 싶다'고 했었다. '지금 나오듯 반만 올리면 어떨까요' 했더니 '다채롭게 가자'고 하고 머리를 내리더니 거울을 보고 올리시더라. 지금은 평소에도 올리고 다니신다고 한다.(웃음)
허 : 설경구는 변신에 민감해하는 배우인데.
변 :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했었다. 연기는 워낙 잘하는 분이니 나중에 잡아가면 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외형부터 이야기했다. 술 먹을 때 '어떻게 연기하면 되겠냐' 하기에 처음부터 '머리를 올리셔야 한다'고 했다. 어이없어 하셨다. '몸에 근육을 붙이셔야 하고, 얼굴에 살이 없으셔야 하고' 등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감독이란 사람이 연기 이야기는 안하고 외형 이야기만 하냐'고 하더라. '연기는 잡을 수 있는데 외형은 지금부터 잡으셔야 한다'고 했다. 열심히 해주셨다. 프리프로덕션 중 사무실에 놀러오면 알통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촬영할 때는 처음 수트 입은 걸 봤을 때부터 굉장히 멋있었다.
허 : '불한당'은 겉으론 마초적 영화 같지만 안은 다르다.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생각을 했나. 병갑(김희원 분)과의 삼각멜로도 있지 않나.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영화를 떠올리며 썼는지 궁금하다.
변 : 처음엔 어떤 영화를 떠올리며 쓰진 않았는데, 고쳐 나가면서는 멜로 영화만 봤다. '다른 느와르와 차별점을 주려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조금 더 보이게끔 썼었는데, 그게 징그럽다는 피드백을 많이 들어서 순화시키는 작업을 했었다. 재밌었던 것은, 설경구와 임시완은 몰랐는데, 전혜진(천인숙 역), 김희원은 읽자마자 '이거 연애물이네'라고 눈치를 챘다는 것이다. '눈치채셨어요?' 했더니 '연애물이다'라고 하더라. 김희원은 내게 와서 '동성애자로 연기하겠다'고 해서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성애자를) 희화화하는 면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서로 동의하고 들어갔다.
허 : 극 중 재호와 현수에 비해 병갑의 이름은 조금 튀는 면이 있다.
변 : 나는 이름 고민을 진짜 안 한다. 기자에게 들었는데 시나리오 속 배역 이름을 보면 감독이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알 것 같다더라. 내게 이름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나는 그냥 주변 사람들이나 시나리오를 쓸 때 앞에 지나가는 사람의 이름을 쓴다.(웃음) 병갑이라는 이름도 고민해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주변에 병갑이란 사람은 없다. '갑을병정' 이런 것을 생각하다 나왔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했는진 모르겠고, 병갑을 만들고 친척이니 병철의 이름도 ('병'을 넣어) 만들었는데 삼촌과 조카 사이에 그러면(돌림자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찍는 중에 들었다.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갔었다. 이름은 진짜 고민을 별로 안한다.
허 : 가장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
변 : 어떤 부분은 생각보다 진했고 어떤 부분은 약했다. 예를 들면 초반부의 따귀 신이나 둘이 서로 지나치며 마주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은 감정선이 생각보다 세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쓴 것보다 찍으면서 훨씬 세게 느껴진 건 철창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 때 보면서, 내가 배우에게 스킨십을 잘 안하는데 설경구와 임시완 두 사람을 안았다. 너무 좋았다.
그 장면을 찍을 때도 액션 커트처럼 안 찍고 카메라가 어느정도 따라가면서 찍었다. 어두운 장면이라 '시완씨의 표정이 잘보이게 잡아달라'고 했다. 그런 게 진하게 나온 것 같다. 시나리오로 썼을 때보다 건조하게 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내가 가다보면 '훅' 갈 때가 가끔 있어서 드라이한 부분을 어느정도 유지하려 했다. 둘이 이 파국에서 눈물을 쏟게 한다기보다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 감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배우들에게 혼선을 안 주려고 여러 주문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허 : 촬영에 가장 오래 걸린 장면도 궁금하다.
변 : (교도소에서 현수가 수감자들에게) 비아그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임시완도 그 장면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임시완이 고전한 장면이었다. 그 때는 (연기가 잘) 안 돼서 내가 이야기하고 흉내를 내기도 했다. 임시완은 너무 바른 친구다. 너무 바른 친구라 '양(아치)끼'가 안 나왔다. 내가 시완씨보다는 조금 '양끼'가 있어서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며 앞에서 대사를 읽었다. 그 부분은 생각만큼 잘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임시완이란 배우의 사랑스러움으로 넘어가는 면이 있었다. 그 때는 임시완 뿐 아니라 영근 역 문지윤이 임시완을 의심하는 장면도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뭔가 그날 분위기들이 안 풀렸다. 설경구 선배는 아니나다를까 투덜대기 시작하고,(웃음) 다음에 찍을 신이 있어 넘어갔다.
관객 1-1 : 고병철과 고병갑, 두 인물 관련해 병철이 병갑에게 '똥 오줌 못가리던 네 애비처럼 그러면 안되잖아'라고 이야기한다. 병갑의 아버지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병철은 병갑을 고아원에서 언제 데려왔는지 관계가 궁금하다.
변 : (영화에) 나오진 않는데 설정 상으로는 오세안무역이 오세안수산일 때부터 병철이 병갑의 아버지와 같이 회사를 만들었다가, 형이 죽으니 자기가 회사를 독점하고 어린 병갑을 고아원에 넣어 기른 뒤 자원이 됐을 때 꺼냈다는 간단한 설정을 했다. 전사를 열심히 만들어 쓰는 편은 아닌데 대략 그 정도였다.
관객 1-2 : 병철이 사람을 안 믿게 된 계기가 있나?
변 : 재호, 병갑, 병철 등 거기 있는 모든 인물들이 서로 뒷통수치며 살아온 인물들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고 순수하게 이익을 위해 살아온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부산으로 설정한 건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때문이었다. 불한당들의 캐치프레이즈를 잘 보여주는 구호라 생각했다. 겉과 속과 다른 것을 보여주는 악당들의 구호. 서로 믿지 못하고 잇속만 차리는 사이라 생각했다. 병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누군가 프리퀄을 하게 되면 자세히 고민하겠는데 여기서 지금 갑자기 만들 수는 없다.(웃음)
관객 2-1 : 관객의 입장에서 봐도 이 영화는 감독의 독선적인 아집이나 고집으로 밀고나가지 않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같이 만든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의 기사나 GV에서 나온 것 말고, 배우나 스태프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포인트로 나온 아이디어 중, 감독이 봐도 굉장히 좋은 장면 혹은 캐릭터 해석이라 생각한 부분이 있나?
변 : 제가 원래 독선적인 성격이 못 된다. 현장에서 카리스마 있는 감독도 있는데 나는 친구처럼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놀림을 굉장히 많이 받으면서 일하는 감독이다. 스태프, 배우들과 일할 때 의견도 많이 물어보는데 러시안 클럽 신의 경우 시나리오에는 클럽으로 설정됐었다. 미술 감독이 물류창고 엘레베이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줬다.
세 편 다 나와 함께 한 박송희 콘티 작가가 있는데, 그 분에게 영화의 흐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일 많이 받았다. 콘티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현장에도 나오지 않고 메인 스태프가 아닌데도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나와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다. 내가 굉장히 많이 배우며 일하는 작가님이다. 그 분이 저를 많이 자극했고 싸우기도 하면서 일했다.
설경구 선배의 웃음소리도 내가 주문한 건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웃으셨다. 교도소 안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전화를 받는데 거긴 대사도 없다. 대사가 없으니 '뭐할까' 하시기에 '아무말이나 하세요. 거기 대사 안 나와요' 했더니 웃으시더라. 그 웃음소리가 너무 좋았다. 약간 천박하면서도, 무게 잡는 걸 무겁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설경구는 그 웃음소리가 사람을 속이기 위한 웃음소리라고 설명해줬다. 굉장히 놀랐는데 사실 믿진 않는다. 나중에 생각하신 것 같다. 그냥 한번 웃어보신 것 같다. 나중엔 그렇게 생각하며 연기하셨던 것 같은데 처음엔 그냥 웃어보셨던 것 같다.(웃음)
관객 2-2 : '무간도' '도니 브래스코'를 언급했는데, 김희원 등장 신에 대해선 앞서 '아저씨'도 언급했다. 오마주처럼 이용한 장면들이 있는데 기사에서 밝히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 중 '당원'들과 같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지 추천해달라.
변 : 기사에서 무슨 영화를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가 뭘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라 되는대로 아무말이나 하는 사람이다.(웃음) 잘 모르겠는데 많았다.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을 보면서 힌트나 영감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좋아한다. 어떤 장르든, 영화를 할 때마다, 로맨틱 코미디를 할 때도 보는 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도 그렇다. 어릴 때 영화 연출을 하도록 이끌었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신은 '아저씨'의 김희원과 김성오가 같이 등장하면 재밌겠다 싶더라. 개인적으로 굉장히 친한 김성오 선배에게 부탁했다.
가장 좋아하는 멜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그런 감성을 좋아한다. 자주 보는 영화는 아니다. 보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관객 3 : (엔딩에서) 현수의 얼굴에 십자가 모양으로 피가 나 있는데, 기독교적 모티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변 : 나는 무신론자인데, 사실 눈에 안 보이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조금씩 넣어보려 했다. 눈에 안 보이게 하려 한 건 이런 질문이 무서워서였다.(웃음) 현수가 재호에게 굉장히 성스런 존재일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표현하고 싶었던 건 죄의식이었다. (현수에게) 죽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니, 십자가 같은 것들을 조금 조금씩 넣었다. 영화에선 제대로 표현이 안 됐는데 (오세안수산 폐건물 신에서) 현수가 '뒤져봐요'라고 하며 팔을 양쪽으로 벌리는 장면은 풀샷이 있었다. 거룩하게 찍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거룩해서 뺐다. '심하게 십자가인데' 생각했다.(웃음)
내가 성경을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읽은 구약 신약만 안다.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그런 형벌을 주며 구원해주는 신적이고 성스러운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그런 요소를 넣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게 이런 것에 대답할만큼의 종교적 상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 4 : 천팀장을 속이기 위해 재호가 현수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있다. 속이려면 조금 더 때리거나 어딘가 멍 들게 하거나 부러뜨릴 수도 있었을텐데 총 두 발을 쏜 의미가 궁금하다.
변 : 시나리오 초반에는 재호가 현수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 것으로 돼 있었다. 재호는 현수를 못 때린다. 못 때려서, 현수가 재호를 계속 도발하고 건드려 크게 화나게 해서 재호가 현수를 때리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 너무 무거워질 것을 대비해 유쾌하고 깔끔하게 가는 걸 선택했다. 원래 총을 두 발 쏘면 그 의미에 대해 둘이 주저리 주저리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현수가 '이렇게 쏴야 천팀장이 어떨(속을) 것이고'라면서 설명하는 장면이었는데 내가 찍으면서도 그게 싫더라. 관객들이 생각하면 될 걸, 알려주는게 촌스럽게 느껴져 그 장면을 뺐다. 그 장면은 엔딩 전까지는 둘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장난스럽게 헤어졌다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 5 : '이 부분은 내가 찍었지만 잘 찍었다. 마음에 든다' 싶은 장면이 있나?
변 : 엔딩과 최선장 패거리 액션 장면이다. 그건(최선장 패거리와의 액션 신은) '내가 찍어도 잘 찍은'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콘티를 짜고 이렇게 만화적으로 가도 되는지 불안했었다. 그런데 잘 나온 것 같다. 경구 선배가 뜬금 없이 이소룡 흉내를 낸 것도 분위기와 잘 맞는 것 같다.
엔딩은 나름대로 나와 촬영 감독만 확신이 있었다. 다 반대했던 엔딩이었다. 모두 반대해서 재촬영 이야기도 나왔었다. 끝까지 고집할 수 있던 이유가 있다면, 첫 날 엔딩을 찍고 나서 촬영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고 '됐다. 했다'라고 했었다. '관객이 얼마 안들지 몰라도 하고 싶은 걸 드디어 해냈다'는 거였다. 그렇게 끝내고 싶었다. 사실 원하지 않았던 뒷 엔딩 장면을 글로도 써놨는데, 그렇게 해 줘서 (엔딩이 완성됐다). 엔딩에서 좋았던 것은, 내가 잘 해서라는게 아니라, '내가 찍었지만 좋았다'는 게 아니라, 임시완이었다. 그냥 나는 그런 콘티를 짜고 롱테이크로 가겠다는 거였는데, 임시완이 얼굴로 완성을 보여줬던 것 같다.
관객 6-1 : 재호는 감옥에서 재소자들에게 금지돼 있는 끈 있는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나오는데 이 설정에 의도가 있었나?
변 : 개인적으로 (극 중 재호가 신은 모델인) '포스'를 좋아한다. 다들 '찍찍이'로 돼 있는 운동화를 신으니 재호는 특별한 신발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20대를 같이 보낸 신발이라 그냥 주인공에게 신기고 싶었다.
관객 6-2 : 지난 GV에서 현수모가 죽은 시기가 5월임에도 매미 소리를 넣은 이유를 이야기해줬는데, 그것처럼 의도적으로 설정했으나 아직 관객들의 해석이 나오지 않은 장면이 있는지 궁금하다.
변 : 해석이 나온 걸 다 못 봤다. 매미 소리에 대한 것은 질문을 하셔서 말씀드렸던 것이었다. 해석을 몇 개 보긴 봤다. 경구 선배도 (관객들의 해석에 대해) '이거 진짜 네가 의도한거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아니오'라는 답이 많았던 것 같다. 성경 관련해 6장31절에 대한 해석(재호와 현수의 수감번호를 성경 구절에 빗댄 해석)도 그렇다. 의도했다면 내가 천재이지 않았겠나.(웃음)
관객 7-1 : 극 중 자막에 나타나는 1일차와 13일차에는 인물들의 착장이 같은데, 사실 두 날이 같은 날짜인 것인가 생각했다.
변 : 예리하시다. 실수가 맞다. 애초엔 날짜 표기를 안 했었다. 후반작업에 했는데 지금도 나는 날짜 표기가 없는 것이 좋다. 그런데 헷갈릴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이 굉장히 많았다. 사실 '이게 과거야. 현재야? 아, 과거구나' 혹은 '현재구나'하며 보길 바랐는데 상업영화에선 그런 것들이 좋지 않을 거라고 날짜를 적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출소 전후로 나눈다고 했고 1일차, 13일차는 그날 내가 써서 준 날짜였다. '이날은 이쯤 됐을 것 같다'라고.
관객 7-2 : 장목사(박수영 분)의 죄목이 궁금하다.
변 : 사기나 간통 등 경범일 것이라 생각했다.
관객 8 : '미스테리아' 인터뷰에서 천팀장이 밀수 현장을 잡으려다 박스 안에 성인용품만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을 아쉽다고 했더라. 재촬영한다면 어떻게 찍을 것 같은가?
변 : 그런 기회가 없어서 생각을 안 해봤는데, 너무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고, 안일했다고 생각했다. 매 장면 '조금 더 다른 것이 있을까' 고민했어야 하는데 그냥 너무 쉽고 뻔하고 유치하고 고루한 방법을 생각한 것 같아서 그걸 찍으면서도 힘이 빠졌었다. 내가 생각해도 별 재미가 없는 장면이었다. 다시 찍는다 해도 짧게 찍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천일염이 들어있는 것도 생각했는데 그것도 유치한 것 같더라.
고민이 조금 더 필요했던 장면 같다. 만약 혹시 다시 그런 장면을 찍는다면 고민해보겠다.
관객 9 : 목사가 재호를 '철창 안의 지저스'라 설명하는 장면들에서 재호의 옷을 보면, 악을 행할 땐 검은 옷, (취장에서) 건배사를 외칠 때는 흰 옷을 입었다. 미술감독이 옷에 의미를 뒀는지 궁금하다.
변 : 의상실장과 '그 때는 하얀 옷을 안에 입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왜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지저스니까 하얀 옷이 낫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허 : '불한당'은 남성영화처럼 보이지만 아닌 부분들이 있다. 무술 감독(허명행)의 경우 남성적 작업을 많이 한 감독인데 이견과 불만은 없었나?
변 : 황당해하셨다. 이런 액션으로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조금 당황해하셨다. '이거 무슨 영화예요?'라고 하셨다. 액션이 처절해야 하지 않냐고. 그래서 20회차 정도 찍은 편집본을 보여드렸더니 '뭔지 알겠다'고 하시고는 바로 액션을 짜 주셨다.
관객 10 : (현수가 정체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재호가 '그 대신에'라고 말하던 중 현수가 '형, 나 경찰이야'라 말하면서 대사가 끊긴다. 재호의 그 다음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변 :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대신에' 까지만 생각하고 쓰는 사람인데, 이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 쪽으로 올 거면 사람들 있을 땐 어느 정도 예의는 지켜달라' 같은, 굉장히 별 것 아닌 내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밑으로 들어오란 이야기 아니고' 이후 재호의 대사는 녹음으로 새로 입힌 대사였다. 시간이 안 맞더라. 설경구가 대사를 했는데, 임시완이 그 때 감정이 아니었는지 '형, 나 경찰이야'라는 대사를 5초 정도 있다가 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사를 넣어 입혔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너랑 나랑 형 동생이고 상하관계는 아니지만' 같은. 현수가 지키지 못할 이야기였지만.(좌중 웃음)
허 : 감독이 '시나리오를 본 관객들의 질문이 예리해 무섭다'고 할 때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제 알 것 같다.(웃음)
관객 11 :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이라는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다른 제목을 생각한 것이 있나?
변 : 마음에 안들었었다. '불한당'이라는 제목이 이상하다고 다들 그랬었다. 사극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불한당' 세 글자가 좋았다. 세 글자는 좋았는데 '나쁜 놈들의 세상'은 개인적으로 영화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제목이었다. 잘 모르겠더라. 제목을 열심히 생각했는데 안 떠올라 그대로 가게 됐다. 일본 개봉 제목('이름 없는 들개의 윤무')은 조금 촌스럽지만 있어보이지 않나. 그런데 '나쁜 놈들의 세상'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경구 선배는 좋다고 하더라. 다 나쁜 놈이니 그럴 수 있다. 나는 '불한당' 세 글자가 좋다.
관객 12-1 : 현수가 감옥에선 김성한(허준호 분)의 최후를 못 보고 나가지 않나. 그런데 이후에는 최선장(최병모 분) 사건을 고병철(이경영 분) 앞에서 재밌었다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보는 재호의 표정이 굳는다. 재호가 자신처럼 변하는 현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변 : 좋지만은 않은, 그러길 바랐었지만 좋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들은) 현수가 '재호화' 되어가고 있는 장면이고, 그건 재호의 노림수였지만, 그걸 그렇게 반기지는 않는 정도의. 단어로만 표현하기에는 확실한 감정은 아닌데, 그럴 때 있지 않나. 친구든 연인이든, 이 길로 가길 원했는데 막상 그길로 가니 (좋지만은 않은) 그에 대한 마음 상태 같다고 생각했다
관객 12-2 : 재호가 현수를 쏘고 나갈 때 어디로 향한다고 생각했나?
변 : 그 때 재호는 원래는 빨간 스포츠카를 향해 가는 거라고 시나리오에 썼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밖에 천팀장이 있는 것도 재호는 알고 있다. 천팀장이 있는 반대쪽으로 나온 거다. 그때 재호의 감정은 정처없는 발걸음이다.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관객 13 : 현수가 출소 후 어디서 지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출소 후 현수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는데 거기에 재호의 영향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변 : 거의 100% 재호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재호가 묵는 호텔이 있다. 거기서 같이 지내는 걸로 생각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그렇게 돼 있었다. 더블베드다.
허 : 더블베드, 많은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 같다. 감독의 입장에서 설경구와 임시완이 실제로 친하게 지내도록 따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제스처가 있었나?
변 : 설경구 선배는 나에게도 어려운 분이다. 경구 선배는 후배들과 굉장히 편하게 지내고 싶어하지만 어렵지 않나. 워낙 '선배님'이다. 저에게도 계속 '형이라 부르라'고 하는데 '선배님'이라고 한다. 껄끄럽더라. (좌중 웃음) 내가 못 부르면서 시완에겐 그렇게 불러달라고 이야기했다. 시완이 굉장히 난감해하더라. '형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난 모르겠고 형이라 불렀으면 좋겠다'고만 했다. 놀란 게, 설경구와 맥주 한 잔을 하는데 임시완이 시간이 된다며 왔다. 오자마자 '형 왔어요?'하는데 내가 놀랐다. '바로 형이라 부르네요' 했더니 '감독님이 시켰잖아요' 하더라.(웃음) 워낙 잘 지냈다. 지금도 임시완이 휴가를 나오면 늘 같이 술자리를 한 번씩 한다.
관객 14-1 : 교도소에서 재호와 싸운 현수가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마치 십자가 모양 같은데, 기독교적 메타포가 있었나.
변 : 맞다. 비슷한 거다. 팔 벌려 쓰러져 달라고만 했는데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보통 쓰러질 때 팔을 벌려 쓰러지지 않나. 차렷자세로는….(웃음) 리허설을 할 때부터 팔 벌려 쓰러져 있더라. '조금만 더 이렇게'라고 했었다.
관객 14-2 : '현수가 재호를 사랑하는 걸 현수는 몰랐다'고 디렉팅을 준 것으로 아는데 마지막에 현수의 감정에선 재호를 사랑했는지가 궁금하다.
변 : 그 감정이, 더블베드라는 이야기도 했지만, 은유적으로 섹슈얼한 느낌을 준 것이다. 나는 현수가 재호를 좋아하더라도 그것을 현수는 몰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텅 비어버린 것이,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야 (자신이 재호를 사랑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그걸 자신이 인지하는 상황이 아니라,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람에게 복수를 했는데 전혀 시원하지가 않은, 그런 느낌을 주려고 했다.
관객 15 : 단역 중 가장 인상깊은 배역이 용찬(최준영 분)이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이름이 없었을 법한 인물인데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고, 코멘터리에도 인물에 애정이 있어보이더라. 용찬의 성도 알려달라.
변 : 그 분량밖에 안찍었지만 초고에서는 역할이 조금 더 있었다. 현수에게 도청기를 달며 깐죽거리다 되려 한번 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리고 (최준영은) 굉장히 좋은 배우다. 처음 미팅 때 대사를 뱉는데 톤이 굉장히 특이했다.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굉장히 질문이 많다. '이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요?' '용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등 귀찮을 만큼 질문이 많다. 집중력도 좋다. 영화 '싱글라이더'에 잠깐 나왔는데 정말 놀랐다. 진짜 잘한다고 생각했다. 용찬은 원래 비중이 더 컸는데 뒷부분을 현수, 재호로 압축시키다보니 빼게 됐다. 용찬은 고교 친구 이름이다. 친구의 성은 현씨다. 민철(장인섭 분)은 내 친구가 아니라서 민철이라고만 썼다.(웃음)
관객 16 : 감독이 추상적으로 상상을 하며 연출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재호와 현수 역에 염두에 뒀던 배우들이 현재 배우들과 일치하는지, 시나리오 이후 생각해보니 이미지에 맞았는지 궁금하다.
변 : 처음 시나리오를 쓰며 초반에 이미지를 생각할 땐 외국 배우들을 생각한다. 거기서 맞춰간다. 원래 현수는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재호는 조금 더 어린 걸 생각했다. 둘이 10살 미만으로 차이 나게 생각하며 초고를 썼었다. 어느 정도 수정, 각색했다.
설경구를 캐스팅한 것은 욕심이었다. 해보고 싶었다. 캐스팅 회의 때 '설경구라는 배우 어때요?'라고 했을 때 다들 '뜨아' 했다. 그런데 임시완도 마찬가지였다. '어때요?' 했더니 '이걸 할 수 있는 이미지일까?'라는 반응이 있었다. 두 배우 다 그런 반응이 나왔지만, 그런 것을 해내는 것이 좋은 배우들인 것 같고, 좋은 배우들과 일해서 기분이 너무 좋다.
허 : 배신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야기가 야구공을 튀기는 재호의 모습과 이어지는 것 같다.
변 : 그렇다. 혼자 벽에 튀기는 행위를 하지 않나.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치볼은 팀스포츠고, 둘이 친해져야 공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나. (출소 후 야구를 하는 장면에서) 원래 설정은 캐치볼이었는데 풍부해보이게 하려고 진짜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으로 바꿨다. (재호는) 외로운, 아무도 믿지 않아 외로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후반부 오세안수산 폐건물 신에서) 현수가 야구공을 던지는 것은 시나리오엔 안 썼는데 (촬영) 이틀 전 '야구공을 튀기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재호보다 현수가 더 외로울 것 같았다. 예전에 가지고 놀던 야구공을 오세안수산 창고에 가져다 놓고, 원래 콘티엔 없던 장면인데 혼자 공을 튀기는 모습들이 잘 표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호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병갑이 왔을 때도, 친구가 왔는데도 등을 지고 벽에 공을 튀기지 않나. 이 역시 상대를 믿지 않는 행위라 생각했다.
관객 17 : 재호의 고아원 시절 과거가 궁금하다. 지금보다 움츠러들어 있었는지, 과거와 현재가 많이 다른 모습이었는지 말해달라.
변 : 재호는 어릴 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약해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이 영화에 나오는 시절의 현수를 만났을 때라 생각했다. 과거엔 고아원의 '지저스 크라이스트'였을 것 같다.
관객 18 : (후반부 오세안수산 폐건물 신에서) 현수가 재호에게 '우리 엄마도 네가 죽였다면서'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재호는 흔들리고 현수는 가만히 있다. 그 흔들림은 누구의 시점을 나타내는 것인가. 재호의 시점인가, 현수의 흔들림인가.
변 : 그 두 번째 해석이 더 좋다. 그런데 나는 첫 번째로 생각하고 찍었다. 다음에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훔쳐쓰겠다.(웃음)
관객 19 : (후반부 오세안수산 폐건물 신에서) 자신에게 총을 달라고 하던 현수에게 민철이가 총을 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변 : 아니. 현수는 바로 민철이부터 쐈을 것이다.
관객 20 : 현수가 재호를 '감으러(상대방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극 중 은어)' 가기 전에 천팀장(전혜진 분)이 '재호가 남색도 하고 여색도 한다'는 (예전 시나리오에 장목사의 대사로 등장하는 내용) 이야기를 현수에게 귀띔해 줬을까?
변 : 아니다. 그런 생각은 없었다. '남색도 하고 여색도 해'라는 예전 시나리오 속 대사는 장목사가 전하는 '그런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나는 모른다'는 이야기다. 천팀장이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 21 : 현수는 재호까지 잃게 되는데, 임시완은 '재호를 죽이러 갈때 이미 마음을 정리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인터뷰를 했더라. 그런데 현수가 재호를 그렇게 잃고 나서 또 누굴 믿거나 의지하거나 사랑할 수 있었을까?
변 : 글쎄. 이 영화에 한정해서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머스탱에 있는 현수는 재호가 된 거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혼자 공을 튀기고,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된 거다. 가볍게 웃으며 살 수는 있을 거다. 마치 재호처럼 가면을 쓰고. 그렇게 생각하며 글을 쓰고 연출했다.
허 : 새 영화 '킹메이커'를 준비 중이다.
변 : 쓰고 준비하고 있는데 기사가 갑자기 나와 당황했다. 나도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정해진 것 없이 준비하며 이야기 중이다. 올해 안에 어떻게든 찍어서 내년 개봉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불한당원'들에게) 너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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